여름 그림
여름 그림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7.06.2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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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사람들은 흔히 여름 하면 꽃보다는 짙은 녹음(陰)이나 소나기 등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여름에 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능소화 접시꽃 채송화 그리고 각종 야생화 등 아주 많은 꽃이 여름을 장식한다. 다만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녹음(陰)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여름꽃 중에 가장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은 단연 연꽃이다. 왜냐하면 연꽃은 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박상(朴祥)은 아예 연못의 연꽃을 화첩에 그려 넣듯 시로 그려내고 있다.

여름 그림(夏帖)

樹雲幽境報南訛(수운유경보남와) 숲과 구름 그윽한 곳에 여름 소식 전해져
休說東風捲物華(휴설동풍권물화) 동풍이 좋은 경치 걷어갔다 말하지 말라
紅綻綠荷千萬柄(홍탄록하천만병) 푸른 연 줄기 천, 만 그루에 붉은 꽃 터져
却疑天雨寶蓮花(각의천우보연화) 하늘에서 연꽃을 뿌린 줄로 알았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도회지든 시골이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다. 빼곡한 나무 숲 위로 구름이 흐르고, 사람이라고는 흔적도 찾기 어려운 깊은 산 속이다. 속세와는 거리가 먼 이곳에도 여름 소식이 남쪽으로부터 들려왔다. 남쪽 소식통에 의하면, 동쪽 바람이 꽃다운 풍광을 모두 걷어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은 실상을 제대로 담지 못한 잘못된 것이라는 게 시인의 생각이다.

시인으로 하여금 남쪽 소식통을 못 믿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연꽃이었다. 동쪽 바람이 꽃다운 물상들은 죄다 걷어 갔다고 했는데, 속세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중에서 시인의 눈에 띈 연꽃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녹색 연잎 사이로 터져 나온 붉디붉은 꽃, 그것도 한두 송이가 아니라 천인지 만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연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광경에 시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은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이 경이로운 광경이 단순한 자연현상일 뿐이라는 데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하늘에 있던 귀중한 연꽃이 비가 되어 내린 것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렇듯 아름다운 풍광이 깊은 산 중에도 있는데, 꽃다운 아름다운 풍광을 모두 동쪽 바람이 걷어 갔다고 한 남쪽 소식통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여름의 진객 연꽃의 아름다움을 그린 시인의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다.

여름이라고 봄만 한 아름다움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다를 뿐이다. 짙은 녹음에 묻혀 잘 눈에 띄지 않을지는 몰라도 강렬한 태양 아래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여름꽃, 그중에서도 시원한 물과 조합을 이루는 연꽃은 여름 그림의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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