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품고 나라의 융성 비는 현암사
대청호 품고 나라의 융성 비는 현암사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6.1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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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에서 대전 쪽으로 대청호변 도로를 달리다 보면 200m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철계단과 돌계단을 올라가서 매달리듯 서 있는 절집이 있다. 바로 현암사다. 현암사는 산등성이 바위에 매달려 있다. 산등성이 아홉 줄기가 강물에 뻗어 있다는 구룡산의 절벽에 매달려 있는 암자라 하여 현암(懸岩)이라 불렀다.

현암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창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전한다. 407년 백제 전지왕 때 고구려 청원선경 대사가 창건했고, 665년 원효대사가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설화로 고구려의 청원선경 대사가 수행처를 찾아 눈이 쌓인 산길을 걷는데 노루 한 마리가 엎드려 자고 있다가 스님을 보고 반갑게 세 번 인사하고는 산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노루가 떠난 자리를 살펴보니 눈이 녹아 맑은 샘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 사찰을 세우라는 계시로 알고 사찰을 건립했는데, 지금의 현암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원효 스님이 현암사를 중창할 때 “천여 년 후에 세 개의 호수가 조성되어, 구룡산 아래에 청룡이 꿈틀거리는 모양의 큰 호수가 만들어진다. 그러면 임금 왕[王]자 모양의 지형이 나타나면서 국왕이 머물게 되고, 이곳은 국토의 중심이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게 된다”는 예언을 했다. 그 예언대로 3개의 호수가 만들어지고, 대통령이 머무르는 별장이 들어섰던 것이다. 오늘날 대청댐이 있는 곳을 `미호', 대청호 보조댐이 있는 곳을 `용호', 청남대가 있는 곳을 `황호'라 하는데, 실제로 대청호에 잠겨 있는 산봉우리들이 겹쳐 왕(王)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폭설로 먹을 것이 떨어지자 바위틈에서 쌀이 나왔다는 전설도 전해지며, 조선 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와 최근에 여러 스님에 의해 중창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등에는 `견불사' 또는 `견불암'으로 나온다. 문의읍지에는 `현사'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현지에서는 다람쥐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듯해서 `다람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청댐의 봉우리를 향로봉이라 하는데, 여기에도 설화가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가 장수 이여송이 구룡산의 정기를 끊고자 쇠말뚝을 박으려 하자, 돌연 천둥번개가 친 것이다. 구룡산이 노한 것이라 겁을 먹은 이여송은 이곳에서 향을 피우고 군사들의 무사 귀향을 빌었다. 향을 핀 곳이 바로 향로봉이다. 이후 중국사신이 조선에 와서 이여송이 이야기한 현암사를 다시 찾고자 했다. 이항복이 조정 뜰에서 사신을 몇 바퀴 돌게 하고는 손으로 허공에 큰 원을 그리며, 이심전심의 선의 경지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답변했다. 이에 사신이 감복해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현재 건물로 대웅보전과 용화전·삼성각·요사 등이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불상과 탱화·동종 등이 봉안되어 있다. 용화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창건 당시 선경이 자연석에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또 절 위쪽에는 오층석탑이 있는데, 이는 절의 석탑 그림자가 호수를 비추면 오래도록 국운이 융성한다는 설이 있어, 1990년 대청호를 바라보는 자리에 오층석탑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새로운 정부의 성공과 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통일을 기원하며 현암사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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