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읍성과 천주교 순교지 이야기
청주 읍성과 천주교 순교지 이야기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5.3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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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은 면적은 작은 나라지만 역사적으로 대단히 큰 나라에 속한다. 특히 전 세계에 존재하는 고인돌의 50%가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유적이 성곽이다. 우리나라는 가히 성곽의 나라라 불릴 만하다. 20세기 초까지 현존했던 조선 성곽은 무려 2,000여 개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우리 충북에 가장 많이 분포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성곽은 대부분 훼손됐는데, 청주읍성도 마찬가지였다. 옛 청주 읍성은 1910년대 일제가 도시정비사업으로 일본인 상가를 만들며 허물어버렸다. 일설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에게 성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로 가장 먼저 허물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주 읍성 훼손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성돌찾기운동을 벌여 찾아낸 600여 개의 성벽의 돌과 새로운 석재로 중앙공원 서쪽에 청주 읍성 서문 성벽 일부를 복원했다. 그러나 복원된 성벽이 청주읍성 전체 둘레 1640m 가운데 35m에 불과하여 복원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수준이다.

청주읍성은 많은 역사적 의미와 사연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 특별히 천주교 박해 시대 순교 터와 신앙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천주교 청주교구의 자료에 의하면, 청주 읍성 주변으로 수많은 순교자의 거룩한 피가 흐른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천주교 성지라고 하면 절두산이나 해미읍성을 꼽는다.

그러나 청주 육거리시장 한복판에 천주교 순교터가 있다. 현재의 청주 제일교회 자리가 바로 조선 시대 청주 영장의 관사 터였다. 이곳에서 오반지와 김준기(안드레아), 야고보와 32세의 나이로 참수로 순교한 최용운(암브로시오)의 신앙 증거 터다. 제일교회 앞에서도 한 분의 순교자가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다. 혹한의 추위 속에 장터로 끌려 나와 곤장 60대를 맞고 순교하신 김사집이 있다. 김사집은 해미에서 벌써 치도곤 90대를 맞고 온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또다시 곤장을 맞아서 순교한 것이다.

그리고 어르신들의 휴식처 중앙공원에 순교자 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복자 원시보와 복자 배관겸의 순교터이자 복자 김사집의 믿음의 증거터 위에 세운 것이다. 원시보는 1799년 4월17일 갖은 혹형을 당하다가 순교함으로써 청주의 첫 순교자가 되었으며, 배관겸도 온몸의 살이 헤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나는 고통 속에서 형리들의 매질로 순교했다. 이를 기려 청주교구는 신유박해 200주년 이듬해인 2002년에 망선루가 보이는 길목에 순교자 현양비를 세운 것이다.

청주 읍성은 서쪽 성벽 일부를 복원한 것 외에는 동서남북에 성문터 표석 하나가 고작이다. 장대터에서는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 없다”고 당당히 고백하며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장 토마스의 불굴의 믿음과 병인박해 때 순교자 손관보(베드로)와 여 요셉 등의 순교의 피가 흐른다. 특히 동문 근처에 있던 청주 감옥은 복자 배관겸과 오반지, 복자 인언민(마르티노), 전 야고보, 오사룡과 윤 바오로, 이영준(아우구스티노) 등의 신앙 증거터이기도 하다. 이곳에 용두사지 철당간만이 외롭게 서 있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민족의 아픔과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한 자랑스런 역사를 청주 읍성의 흔적에서 찾아보는 6월이 되면 좋겠다. 자신의 가치관과 개인의 신앙적 순결만이 아니라 이웃과 나라와 민족의 행복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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