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뤼도
트뤼도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7.05.1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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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남의 나라 총리 이야기를 해보자. 나의 삶과 관련되어 나를 몇 번씩 놀라게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총리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 캐나다의 총리 트뤼도는 1971년생이다. 40대 초반에 총리가 되었다.

39살짜리도 프랑스 대통령이 되니 별일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각제에서는 당대표가 총리가 되는 것이니 정치적 경륜은 트뤼도가 더 있어 보인다.

그런데 나에게 트뤼도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아들 쥐스탱 트뤼도(Justin Trudeau)가 아니라 사실 아버지 피에르(Pierre) 트뤼도였다.

아버지도 캐나다 총리를 15년 동안이나 했으니 유명했거니 하지만, 나는 그 때문이 아니다.

내가 중고생 때 아버지 트뤼도의 부인은 해외토픽의 단골손님이었다. 부인이 팝가수 롤링 스톤즈의 멤버 미크 재거와 염문설에 휩싸이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대하는 그 나라가 재밌었다. 부인도 재밌었지만, 남편도 재밌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캐나다사람도 재밌었다. 아니, 이상했다는 표현이 당시로써는 더 어울렸다.

1977년 3월 21일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젊은 가수와의 염문 증발소동에 이어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공적생활을 포기한다고 인간선언을 했던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수상부인 마아거리트 트뤼도 여사는 독립된 생활을 위해 뉴욕 맨해튼에 아파트를 마련, 주3, 4일은 사진사로 일하고 주말에는 남편과 세 아들을 보러 오타와로 돌아가는 생활을 할 계획이라고 미국의 피이플 지가 18일 보도했다.'

그러니까 현 총리의 엄마는 자유와 개성을 찾아 퍼스트레이디를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증발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수상부인이라는 이름보다 28살의 젊은 자신이 중요했다. 그녀는 남편보다 30년 연하였다. 1984년에 마침내 이혼이 이루어진다.

우리 7, 80년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 그쪽 나라에서는 벌어지고 있었다.

트뤼도는 프랑스어권이라서 그런지 이중언어법을 제정했지만, 프랑스권인 퀘벡이 독립한다고 국민투표를 할 때 한사코 반대해서 캐나다의 분리독립을 막았던 인물이다.

자신의 정치적 배경과는 다르게 이성을 따라 행동한 것이다. 아울러 이민자에게도 평등한 대우를 강조하여 우리식 `다문화'(multi-culturalism)라는 개념을 정치적으로 안착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캐나다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내가 더욱 트뤼도를 기억하게 된 것은 트뤼도가 2000년에 죽었을 때 아들 트뤼도가 한 조사(弔詞)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정적과 밥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도와준답시고 상대방을 비꼬았는데, 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비난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글쎄, 아버지의 가르침이 훌륭해서 그랬는지, 그 가르침을 기억한 아들이 훌륭해서 그랬는지, 부자는 캐나다의 수상을 역임한다. 대대로 이어온 관용의 정신이자 타협의 원칙이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는다고 남을 싫어할 권리는 우리 아무에게도 없다. 아니, 남이 나와 같은 생각을 모두 가져주었으면 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독단과 편견이 싹튼다. 세상은 온통 파랑일 수도, 빨강일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프랑스식 정치문화겠지만, 트뤼도는 이혼 후 결혼도 안 한 채 딸도 낳았다. 트뤼도는 말했다. “국가는 국민의 침실에 관여할 이유가 없다”고.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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