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이지수<청주 중앙초 사서교사>
  • 승인 2017.04.1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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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말하는 행복한 책읽기
▲ 이지수

작년에 청주로 이사를 계획하며 제일 먼저 한 일이 텔레비전을 사는 일이었다. 몇 년 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집에서 TV를 없애고선, 시청 못한 아쉬움을 보상받듯 한동안은 새벽녘까지 몰아서 보기도 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은 더는 몰아서 볼 드라마도 없어, 보고 싶은 프로그램에 관한 한 `본방사수'라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중이다.

요즘 시청하고 있는 드라마는 최근 방영을 시작한 `시카고 타자기'다. 극 중 소설가 역인 유아인 씨의 대사 중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었는데, 글로 써내려가지 않으면 작가 자신이 미쳐버린다는 대사였다. 얼마 전 시인 가시리 선생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 소위 `글쟁이'라 불리는 작가들은 내면적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업보를 지녔구나, 어렴풋이 느꼈던 대사였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박완서, 현대문학)'는 작가의 살아생전 마지막 산문집이다. 불혹의 나이에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해 마지막까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이 행복하다고 말한 박완서 작가는 글쟁이라는 업보를 즐긴 분일까, 도리 없이 그냥 감당해낸 분일까?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수많은 저서 중에서 유독 이 책만큼은 그 분을 좋아한 독자들로 하여금 그분이 어떤 분인지 역으로 되짚어가게 한다.

`마지막 저서'라는 생각에 첫 페이지 작가의 말에서부터 벌써 뭉클해진다. -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 노쇠한 몸이지만 지치지 않는 필력으로 사력을 다해 낸 책이란 생각에 다 읽기도 전부터 무한한 이해와 무조건적인 애정이 솟는다.

작가가 책 속에서도 언급했듯이, 상흔의 기억은 글을 쓰는 자신에게 원동력이 되어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도 위안과 치유의 과정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작가가 언급한 `못 가본 길'이란 인생의 막차에서 바라본 작가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빗겨간 길로 자신에게는 못내 아쉬운 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의 또 다른 저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전쟁세대이다. 두 권의 책에 의하면 작가가 이 산문집에서 말하는 `못 가본 길'은 그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학이라는 상아탑에서 누리지 못하고 박탈당했던 지성에의 탐닉과 기회의 박탈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아쉬움이 등단 이후 작가로서의 삶으로는 탄탄대로였을 작가생활에 대한 부정은 아니라는 것도 의미가 크다. 작가는 작가로서의 성공은 성공이되, 그럼에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가본 길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말한다.

사실 지극히 평범한 우리도 살아가면서 늘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런데 선택하지 못한 길에 더는 후회하지 마라,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는 말은 진심을 속이는 무의미한 말인 것 같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모두 완벽하지는 못한지라 후회로 점철된 과거에 그때 내가 이랬다면 지금은 어땠을까하며, 돌이킬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과거를 반추하기 마련이다.

나의 미련은 육아와 학업을 도저히 병행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중간에 그만둔 문화자원 기록관리학전공이다. 지금도 좋지만, 대학 때부터 꿈꾸던 기록연구사의 길도 그 나름대로 `가지 않아 좋은 길'로 기억하며 여전한 미련으로 남겨두고 간직하고 있다. 무던히도 미련 맞아 보일지는 몰라도, 이전의 어느 즈음에서 놓아버린 그 길이 지금의 나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하고, 무료한 오늘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무의식 속의 근원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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