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향
봄 향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7.03.3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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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나흘째다. 여릿여릿한 줄기와 작고 보드라운 잎이 아침추위에 잔뜩 움츠려 있다. 겨울을 버티고 고개를 내민 쑥이다. 쑥은 만병통치약으로 위세를 떨치던 국화과의 다년생 풀이다. 진시 왕이 찾던 봉래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그 쑥 앞에 앉아 있다.

단군신화에도 등장했던 강인한 생명력과 당당함을 여린 모습에선 찾을 수 없다. 추위를 견디고 있는 모습만 애처롭다. 쑥을 뜯다 보면 손놀림은 빨라도 바구니가 쉽게 차질 않는다.

마음만 조급하다. 나무초리를 흔들던 찬바람이 목덜미를 휘돌다 옷 속으로 파고든다. 까맣게 쑥 물든 손끝이 몹시 시리다. 햇빛이라도 덮어준다면 좋겠지만 온통 잿빛이다.

유년시절부터 봄은 쑥 향으로 먼저 왔다. 애쑥이 싹을 내밀면 제일 먼저 쑥국을 끓여주고 쑥버무리는 계절이 바뀌기 직전까지 봄철시식거리고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 덕분에 지금도 쑥 향을 맡아야 봄이 왔다고 인정한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쑥으로 기운을 돋게 하던 어머니께서 고관절골절로 수술을 하셨다. 견디기 어려운 통증과 죽음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는 공포를 이겨내기가 몹시 힘겨우셨는지 말문을 닫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신다. 모든 게 부푸는 봄날에 우리는 오히려 잦아들고 있다.

병실에서 이틀 밤을 새웠다. 어머니를 간병인에게 맡기고 다 큰 자식들이 무얼 해먹고 지내는지 걱정스러워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반갑게 맞이하던 외손녀가 금방 돌아서더니 엄마 소리를 입에 달고 제 어미를 졸졸 따라다니며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부엌에서 손녀의 모습을 지켜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저랬을 터인데, 다 크도록 엄마가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기가 죽고 불안했었는데, 열아홉에 나를 낳고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에 수없이 보따리를 쌌어도 어린 나를 두고 차마 집을 나가지 못했다고 했었는데, 오남매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양쪽 무릎이 다 망가졌어도 당신 딸이 제 자식 때문에 속을 끓이면 그게 안쓰러워 애를 태우던 어머니인데 그 딸은 시부모 챙기는 일이 먼저고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는 늘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친정에 가겠노라 전화하면 몹시 반가운 목소리로 “그래,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얼른 와”하며 만사를 제쳐놓고 기다리던 어머니의 외로움을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따뜻한 밥한 끼 먹는 일에 인색했다. 불효자식이었다. 죄책감과 서러움에 뜨겁던 눈시울이 통곡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쑥버무리를 좋아하신다. 잎 뒤에 떨이 보송보송한 참쑥 앞에 나흘째 앉아 있는 이유다. 이젠 내가 어머니께 봄 향을 안겨 드리려 날마다 병원으로 간다. 내게 봄 향은 쑥 향이고 어머니의 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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