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의 열사 김제환 선생을 기리며
결의의 열사 김제환 선생을 기리며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3.2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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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유관순을 열사로 안중근을 의사로 부른다. 열사와 의사는 어떻게 구분해서 불러야 할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열사'는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으로, 그리고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의로운 사람'으로 풀이하고 있다. 풀이를 종합해 볼 때 `열사'는 `나라를 위하여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절의를 지킨 사람'이고,`의사'는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며, 때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풀이를 통해서도 일반인들은 `열사'와 `의사'를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이 두 부류의 의로운 지사의 차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열사'는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으로, `의사'는 `무력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이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열사'는 맨 몸으로, `의사'는 무기를 들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운 분이라고 보면 가장 쉽게 구분이 될 듯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우리 고장 청주에 온몸으로 나라 사랑을 실천한 `결의의 열사'가 있다. 충청북도 청주 출신의 김제환 열사이다. 자는 문도(文道), 호는 소당(素堂)이라고 쓰는 김 열사는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탄하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제자들을 모아 배일사상을 교육하고, 호적 등록과 납세·부역 등을 모두 불응하며 항거하다가 6개월간 감옥에 투옥되었던 분이다.

1913년 2월 청주에서 신영태, 이종만, 신학석, 변영인 등의 민족지도자들과 일제에 항거운동을 하던 중 일제 헌병대에 다시 구금되었다.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일제가 제공하는 음식물을 절대 먹을 수 없다고 말하며 결연히 단식투쟁을 결행하여 1달여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청원군 오창면 이산리에서 민족의식과 계몽의식 고취를 위한 지역의 주민들을 모아서 성산대강회를 개최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주창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다시 붙잡혀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옥고와 온갖 고문 끝에 더 이상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찾을 능력이 부족함을 느낀 김 열사는 일제 총독에게 일본의 불의를 힐책하는 항일유서를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단식을 결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자결 순국으로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 김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독립 정신을 기려서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청주시에서 상당산성을 넘어 미원으로 가는 길옆 낭성면 이목리에는 김 열사를 기리는 `이정사'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항일 투쟁을 결행한 한원진, 박유형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는데, 일명 `낭성사'라고 하며 1969년에 김성환과 신태구 선생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69년에 중건하고 1979년에 해체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 집이다.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자녀의 손을 잡고 조국을 목숨보다 사랑하신 열사들의 흔적을 찾아가 보자.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기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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