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주머니 정리하기
감정 주머니 정리하기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7.03.16 1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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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혼자 아프고 난 아침엔 어떤 감정을 꺼내야 할까? 눈을 내 안으로 떠본다. 그리고 안에 있는 감정의 주머니를 살펴본다. 요즘에 자주 드는 감정은 서러움과 아픔이다. 머리맡에 있는 손거울을 집어들었다. 패인 입가 주름 속에 어둠을 채우며 경련처럼 흘렀을 시간이 떠오르며 아렸다. 미치게 아플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아프고 난 후에 아픈 밤들을 돌이켜 보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혼자 아파야 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외로움이 고개 드는 게 싫어 영화관으로 차를 몰았다. 영화관이 바로 지척인데 갑자기 배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빙판에 알몸으로 뒹구는 것처럼 한기가 몰려왔다. 핸들을 돌려 급히 집으로 왔다. 보일러를 켜고 침대에 전기장판을 깐 후 온도를 최대로 올렸다. 배가 쿡쿡 쑤시고, 스파링을 하고 온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고 펄펄 끓었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장기 출장을 갔고 아들은 불금이니 친구들과 신나게 불타고 있을 것이다. 나는 홀로 아픔을 견뎌야 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왔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지카바이러스 위험국가에 다녀왔으니 증상이 있으면 바로 병원으로 가라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문자가 새록새록 떠오르며 두려움이 몰려왔다. 스마트폰을 집었다. 혹시나 하여 지카바이러스의 증상을 검색했다. 근육통은 있었으나 결막염 증상이 없는 것 그리고 설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지카바이러스 감염은 아니라는 자가 진단을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시 배를 쥐고 끙끙거리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속이 울렁거려 눈을 뜨니 환하게 켜진 불이 맥없이 나를 덮고 있었다. 얼른 화장실로 튀었다. 변기를 붙잡고 속을 다 게워 내고 겨우 몸을 일으켜 변기 위에 앉았다. 적막이 가득 내려앉은 화장실에 번들거리는 타일만이 조직적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타일 바닥을 짐승처럼 벅벅 기어 나와 마른 볏단처럼 침대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햇살이 눈을 간질여 슬며시 눈꺼풀을 열고 창밖을 보니 한낮이었다. 한참을 침대에서 창밖을 쳐다보다 또 스스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스름 저녁이었다. 일어나서 물을 한 컵 떠들고 침대로 올라와 갈증을 식혔다. 물이 들어가자 다시 위가 칼로 저미는 듯 아프더니 다시 설사를 했다. 그렇게 이틀을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온 아들이 걱정이라는 감정을 꺼내 보이며 약을 사왔다. 나는 약을 밀어 놓고 물만 마셨다. 어떤 병이든 삼일은 아파야 낫는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오래전부터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일 째 되는 날부터 나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요즘 부쩍 서러움이라는 감정을 꺼내서 가슴에 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작은 일에도 서럽고 작은 일로 아프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 주머니를 잘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기쁨, 감사함, 사랑 뭐 이런 긍정적인 감정을 자주 꺼낼 수 있도록 맨 위쪽에 자리하도록 정리를 해 본다. 슬픔, 서러움, 노여움은 저 아래쪽 후미진 곳에 접어 둔다. 아주 가끔 만 꺼낼 수 있도록. 오늘을 혼자 아팠던 밤의 서러웠던 감정을 훌훌 털고, 혼자서 아픔을 굳세게 이겨낸 후 찾아오는 평온함이라는 감정을 꺼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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