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그러데이션
맛의 그러데이션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7.03.1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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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글로벌시대 외국에 있는 한국 식당가에는 매운 음식을 찾는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알려진 한국 음식은 불고기와 비빔밥 우리나라의 대표 음식이었으나 최근 들어 김치찌개, 두부찌개뿐만 아니라 매운맛이 강한 떡볶이와 낙지볶음까지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입맛이 없을 때나 혹은 아프고 나면 깔깔한 입맛을 돋우는 매운 음식을 찾지 않던가. 그들이 매운 한국 음식에 빠진 이유는 단맛과 매운맛의 완벽한 조화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외국인 입맛에 우리의 매운 음식이 묻어져 가는 것이다.

칠이 벗겨지고 퇴색되어 색깔마저 희미해진 손때 묻은 함지박이 반닫이 위에서 그리움을 불러오는 날, 모임 차 쌈밥 집에 모였다. 촌스런 풍경이 흐르는 실내 갑자기 땅속에 스멀거리던 용암 덩어리가 솟구쳐 오르는 듯 불 같은 울음보가 터졌다. 정갈하게 잘 차려진 밥상, 백옥 같은 하얀 접시에 파란 옷을 입고 드러누운 듯한 청양고추의 아름다운 유혹을 아이는 뿌리칠 수가 없었나 보다. 부산한 식당에 저마다 바소쿠리만한 입으로 쌈을 먹기에 바쁜 그 사이 아담한 청양고추를 여린 아기가 한입 베어 문 것이다. 그 타들어 가는 불을 무엇으로 끌 수가 있단 말인가! 식당 안은 이내 도떼기시장이 돼버렸다. 프라이팬에 참깨 뛰어오르듯 펄펄 뛰며 가슴을 져 뜯는 아이는 실신하듯 울음 끝이 보이질 않고 어른들은 진땀을 빼고 있었다. 왁자한 식당, 일행은 눈을 피해 킥킥거리며 웃음을 감추고 눈 화살은 내게와 꽂힌다. 매운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난 김치종류를 물에 헹구어 먹는다. 어쩌다 먹기라도 하면 알짝지근하니 이내 배탈이 나 밤새 고생을 하니 어쩌랴. 앞 접시엔 언제나 뻘건 김치를 헹군 국물이 찰랑거리는 식탁,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나 자신이 야속하기만 하다.

외식과 회식이 잦은 우리 문화, 경양식보다 찌개와 찜이 생활화된 음식 때론 즐거워야 할 식사가 내겐 고통일 때가 허다하다. 뻘겋게 지글지글 끓어 넘치는 찌개를 호호 불며 두루뭉수리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연신 훔치며 먹어야 제 맛이라는 회식, 미식가들이 정신없이 먹고 있는 사이에 청양고추를 먹은 아이처럼 식성에 맞지 않으니 염치를 불구하고 특별주문을 하거나 구석진 자리를 찾아 겨우 허기를 달래야 하는 신세다. 나름 코에 자극을 준다든지 콧등을 문지르면 매운맛을 완화 시킬 수 있다고 해 수없이 해보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차라리 정신이 아득해지는 매운 음식보다는 입천장이 벗겨지도록 뜨거운 음식이 더 구미가 당겨지는 게 사실이다. 우리의 입맛은 짠맛, 단맛, 신맛, 쓴맛을 혀의 안쪽과 끝 그리고 가장자리 즉 전체에서 느끼는 미각이다. 매운맛과 떫은맛은 미각이 아닌 통각이라 한다.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통증을 느끼는 것이니 당연 매운 음식을 먹으면 혀가 아프고 쓰라린 것이다. 그중 난 통각의 맛을 느끼지 못해 늘 싱거운 식사를 즐겨한 거다.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시켜 눈으로 먹고 오감을 만족시킨다. 맛과 멋을 담고 건강까지 담아낸 선조들의 찬선(饌膳)이 급격한 사회발전으로 외면당하면서 패스트푸드가 각광을 받고 있는 요즘,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는 슬그머니 빵과 함께 내 곁에 자리 잡았다. 일어나자마자 커피와 빵을 찾고 있으니 때때로 의아스럽기도 하다. 조반상부터 뚝배기 된장찌개보다 빵 한 조각과 커피 한잔이 빛과 그림자처럼 자연스럽게 따라다니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입 안 가득 얼음을 물고 눈물 콧물로 범벅된 아이는 흐느끼며 엄마 품에서 병아리처럼 파닥거리고 있다. 회오리바람이 훑고 간 식당은 수은등 불빛처럼 평온해졌다.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커피자판기를 꾹 누르고 어느 순간 우리의 맛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매운맛보다 더 매운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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