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구연마(體究硏磨)
체구연마(體究硏磨)
  • 법원 스님<청주 능인정사 주지>
  • 승인 2017.02.0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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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 법원 스님

인연 따라 얻고 배우고 익힌 것은 때가 되고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게 마련이다.

참되고 다함이 없는 무진장(無盡藏)한 무가보(無價寶)의 보물은 자기의 불성으로 철저한 수행을 통한 체험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선수행의 구조를 무문(無門) 혹은 무문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종의 공안집인 무문관에서 “대도에는 문이 없다”라는 말을 강조한다.

불법의 수행은 철저한 스승의 지시에 따른 수행 방법을 이수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 구조를 입격(入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격(格)은 틀이나 격식을 기준으로 실천 수행의 구조적인 규칙이나 규범, 혹은 틀을 말한다. 규범과 규칙을 원칙으로 한 실천 수행은 올바른 스승에게 나아가는 것처럼 여법(如法)한 선 수행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모든 교육이나 기술, 예술의 배움에는 먼저 그 어떤 기준이 되는 격식에 자기의 모두를 투입시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체구연마(體究硏磨)시켜 익히고 숙달시켜야 한다. 즉 자기 개인의 제 마음대로의 자유와 방종을 버리고 비좁고 부자연스러운 수행의 틀 속에 뛰어들어가 그 격식과 규칙을 몸으로 익히고 배워, 그 부자연스러운 규칙과 격식의 틀이 몸에 익어서 자유스럽게 될 때 마침내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이를 출격(出格) 혹은 파격(破格)이라고 한다.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를 체득한 사람을 임제조사 스님께서는 출격견해인이라고 하고, 원요심요에서는 출격대도인이라고 했다. 선에 있어서 자유는 이러한 기본적인 수행 규범을 익히고 몸에 푹 배게 해, 그 수행의 규범을 자유 자재롭게 사용하고 구사하며 자기의 평범한 일상생활로 되어 버리게 될 때 비로소 무애 자재롭게 진리의 세계인 법계에 유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규범이나 법규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 경지에서 마음에 내맡긴 채로 자유롭게 거니는 임의 자재로운 해탈 자유인으로 살 것이다.

요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깨달음)의 세계'란 말이다. 이 말은 `임제록'에 나오는 구절로 임제 스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납자들이여, 불법은 애써 힘쓸 필요가 없다. 다만 평소에 아무 탈 없이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자면 그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길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짓일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의 수처작주(隨處作主)가 곧 그대로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경계를 맞아 회피하려 하지 말라. 임제 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으로 임제종의 개조다. 어느 날 선사는 대중에게 위와 같이 말했다. 수처(隨處)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고 삶터이다. 작주(作主)란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라는 뜻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 속에서도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최고의 행복한 세계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늘 변화의 흐름 위에서 살아간다. 변화하는 인생의 흐름 속에서 분명한 것은 `나는 나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받고 즐거움을 받는 주인은 바로 `나'이다. 아울러 고통과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주인도 다름 아닌 `나'이다.

법구경에서는 `자기야말로 가장 사랑스런 존재'라고 노래한다. 부처님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아집, 교만, 독선으로 나를 내세우며 자존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생의 참된 주인공은 이런 편견과 오만에서 벗어나 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마음가짐과 마음 씀은 내 인생의 씨앗이고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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