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년 전 악녀일기 발견되다
2백년 전 악녀일기 발견되다
  • 이지수<청주 중앙초 사서교사>
  • 승인 2016.12.26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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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말하는 행복한 책읽기
▲ 이지수

이 책의 제목만 봐서는 얼핏 10대 소녀들의 섬세한 심리를 담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제목 가운데 `악녀'라는 단어가 그렇고 특히 `일기'가 그렇다. 하지만 책 내용은 제목과는 달리 단순하지가 않다. 이 책은, 노예제도가 성행하고 있던 2백 년 전의 상황을 주인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담은 일기형식의 책이다.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 악녀가 누구인지 정확히 짚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갈등상황을 초래하는 악녀를 상대하는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화자인 마리아조차 제목에서 자신이 왜 `악녀'라고 불리는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마리아와 그 가족들에게 노예들이란 그저 소유할 수 있는 동물, 물건, 소모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 페이지에서조차 마리아는 자신의 멋진 여행을 계획하며 끝을 맺는다.

일부 독자들은 마리아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주변 상황에 의해 자연스럽게 하찮게만 여겨오던 노예들에게 갑자기 관심을 갖고 바라보라고 강요할 수 없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고개를 저으며 책장을 덮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남북전쟁 후 많은 것이 변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말 같지도 않은 상황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적어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에서처럼 노예의 입장에서 바라본 에피소드가 한 두 개쯤 있었다면 훨씬 감동적이었을까? 하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런 에피소드는 하나도 넣지 않았다. 마리아의 시점에서 쓰인 총 40개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쓰인 짧은 이야기들을 읽는 내내 일기 속의 화자가 `소녀'라는 점에서 노예에 대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이 주는 불편하고도 묵직한 울림이 된다. 이런 점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었는지 `이백 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돌프 페르로엔, 내 인생의 책)'은 독일청소년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다시금 평소 습관처럼 제목의 이 백 년 전, 에서 눈길이 머문다. 그럼 이 백 년 후의 지금은? 현실도 이에 못지않기에 왠지 씁쓸해져 온다. 마리아와 같은 사고로 인간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 일부 사람들에 대한 뉴스들이 연일 쏟아지는 지금이다.

어린 초등학생들조차 최순실을 안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진실을 목전에 둔 시점이다. 우리 어린이들이 `마리아'처럼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어른들이 잘 해결해나가야 할 중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민주적임을 표방하나 아직도 다수는 다수의 이득을 위해 소수를 억압하거나, 그 반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또 수시로 소수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사회 속에 노상 살고 있는 나는, 사람의 인간성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성악설을 믿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자각하여 더는 악해지지 않고, 중도를 지키고, 원칙을 지켜 더는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힘도 그 사람 속에 있다고 믿는다. 걸핏하면 쪽수로 누르지 않고, 막대한 책임감으로 임시로 주워졌을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며,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각자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사회! 과연 이백 년 후에는 이루어져 있을까?

당장 몇 년 후에라도 이 글이 너무도 당연한 것을 쓴 것이 된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드는 아름다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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