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대표 임정 요인 연병호 선생을 아시나요
충청도 대표 임정 요인 연병호 선생을 아시나요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12.2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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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충청도를 대표하는 역할을 했던 분이 연병호 선생이다. 선생은 1894년 11월 22일 충북 괴산 도안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형(연병환)의 영향을 받아 민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서 공부했는데, 이곳에서 교육부 간사로 있던 안재홍 선생과 조소앙의 동생인 조용주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서 민족운동을 하였다.

1919년 다시 국내로 돌아온 선생은 청년외교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청년외교단은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편, 국제외교를 통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였다.

회원은 40여 명으로, 서울에 본부를 두고 임시정부에 건의서와 자금을 보냈으며,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 참가단체 조사표'`피해 의사(義土) 조사표'`가옥파괴 조사표' 등을 작성했으며, 기구를 확대하여 `배달청년단'으로 확대·개편하려다가 그해 11월에 일본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많은 회원이 검거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그 후 선생은 1919년 말에 만주로 건너갔는데 그 이유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을 연결시켜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였다. 만주로 건너간 선생은 대한정의단과 대한독립광복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독립투쟁에 전념했다.

1922년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국인들의 대동단결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세계한인동맹과 유호청년회 등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난국을 극복하고자 결성된 `시사책진회'에도 동참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에는 베이징으로 옮겨가 중국 인사들과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무장투쟁 방략을 모색하며 1925년 한중연합단체인 동서혁명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활동 무대를 만주로 옮긴 선생은 신민부의 군자금 확보 등에 참여하였다.

1929년 만주에서 다시 난징으로 근거지를 옮긴 선생은 난징의 한인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한국혁명당을 결성했다. 1933년에는 과거 신민부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신민부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재만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의 합당을 성사시켜 신한독립당으로 통합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거사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동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충청도를 대표하는 의원 자격으로 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하며 김구 선생을 도와 임시정부를 이끄는데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항저우, 진강 등으로 이동하며 어려움을 겪던 중 1937년 초 상해거류조선인회장인 친일파 이갑녕 저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상하이에서 일경에게 붙잡힌 선생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4년까지 7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청년외교단 등 외교론적 독립운동과 만주독립군과 임시정부를 연결하는 등 외교독립과 무장독립투쟁을 섭렵한 독립운동가 연병호 선생은 특히 “민중의 힘으로 독립을 이룩하려 했다.”라는 말씀에서 진정한 독립의 의미를 내면화하고 투쟁하신 민족의 큰 어른임을 알 수 있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건국에 큰 역할을 하신 선생의 뜻과 정신을 계승하여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후손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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