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바쁘게 산 이들에게
정신없이 바쁘게 산 이들에게
  • 안승현<청주시문화재단 팀장>
  • 승인 2016.12.20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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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 안승현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올 한해 어떠셨나요?”

“그저 그렇습니다 ㅎㅎ” “정신없이 바쁘긴 했는데 글쎄요”

한해의 마무리 즈음에 건네는 인사다.

나이 숫자와 비례하는 속도와 쏜살처럼 빠른 시간 속에서의 올 한해.

아홉수라 그랬나. 많은 일이 있었던 한해다. 좋은 일보단 좋지 않은, 좌절에 가까운 판단으로까지 치닫는 상황에서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그간 나와 함께했던 사람들과 땅이라는 디딤 안에서 느림을 맛보았기에 가능했던 듯하다.

한해의 농사는 온전히 땅에서 일어난다. 그저 한 움큼의 흙이라 하지만 어마어마한 미생물이 자라고 있고, 미묘한 움직임 속에서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그 땅에서 자란 생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입에서 씹히는 감과 향이 다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땅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땅이 건강하다는 것은 생물이 자라는 속도보다도 더 느린,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느림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느림은 지속적이며 거대한 에너지의 확산이다.

땅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매일 받아낸 소변으로 액비를 만들고, 버려지는 식재료의 부산물과 낙엽으로 퇴비를 만들고, 쌀뜨물로 미생물을 배양하고, 조개껍데기로 석회를 만들어내는 번거로움을 즐거움으로 행복한 시간으로 바꾼다.

억지로 그늘막을 만들지 않고 나무그늘 밑에서 자란 표고버섯의 탱글탱글한 맛과 깊고도 그윽한 향은 입안에서 몸속 깊숙이서 나갈 줄을 모른다.

물을 줄 때에도 가능한 한 멀리 준다. 물을 찾아 뿌리가 많아지고 길어진다. 그만큼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뿌리가 자라는 속도는 느리다. 풀과 함께 자란 먹거리는 보잘것없는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건강한 맛을 준다.

가능한 한 느림을 지향한다. 느림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빠른 결과만을 바라다보면 억지를 부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농사는 되지 않는다. 주변이 온통 어지러울 정도의 약을 쓴다. 촉진제며 제초제며…. 맹독성의 약이 억지인 것이다.

느림의 또 하나. 공예의 가치를 알고, 감동하는 일본인의 일상생활, 유리학교의 역사를 만들어낸 분을 만났다.

젊은 인재가 모일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건강하고 살아있는 땅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유리로 지역을 브랜드화시키는데 10여년, 정착시키는데 20여년, 공예로 브랜드화하는데 20여년 정착시키는데 20여년, 느림의 가치로 공예가 발전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지지하는 일본인들의 인내심과 끈기가 공예산업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그분.

공예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공예비엔날레를 만들어낸 청주라면 열정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한 그분에게서 느림을 느낀다.

공예는 느림이다. 느림은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다. 잔잔하고도 벅찬 감동이다. 느림의 땅은 자연이고 건강한 정신이다.

공예에 헤아리기 힘든 깊이감에서 오는 잔잔함이 있다. 공예의 화려함은 느림의 깊이감에서 보여지는 윤슬이고, 자연에서 자란 건강한 먹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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