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주는 여자
죽여주는 여자
  • 임성재<시민기자 · 칼럼니스트>
  • 승인 2016.10.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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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명예 대주교는 지난 6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말기 질환 환자들에게 `조력자살'의 권리가 허용돼야 한다면서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조력자살은 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질환 환자의 동의를 받아 의사가 약물을 투여해 생을 마감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신성함을 숭배하지만 삶의 질을 주장하는 쪽에 더 끌린다며 자신도 때가 되면 조력자살을 선택하고 싶다는 투투 명예 대주교의 말은 죽음을 자율 의지가 아닌 운명처럼 여기며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모질게 견뎌야만 했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 주고 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류는 100세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그것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삶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가 심각하게 논의하고 합의해야 할 중요하고 시급한 핵심 사안이 되었다. 생명의 소중함의 가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나아질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 타인에게 의탁하여 모두를 피폐하게 하는 존속은 사회에 부담만을 가중시킬 뿐 생명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하기 때문이다.

스위스로의 자살 여행이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미 스위스는 1942년에 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법률이 통과되어 의사가 치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환자에게 자살을 위해 독극물을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의사나 제3자가 아니라 반드시 환자 본인이 아무런 도움 없이 직접 자신의 몸에 독극물을 투여해야한다는 규약이 있다. 1998년에 설립된 디그니타스병원은 스위스에 있는 4곳의 안락사지원 병원 중 유일하게 외국인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존엄한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이 이 병원을 찾고 있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위해 자국민 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향한 여행을 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상영 중인 `죽여주는 여자'는 한국 사회의 삶의 우울한 단면과 노인의 삶과 죽음을 직면하게 하며, 조력 자살에 관한 투투 명예 대주교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한다. 종로 일대에서 노인들을 상대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65세의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 역)은 노인들 사이에서`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로 인기가 높다. 그러던 어느 날 한때 자신의 단골 고객이었던 송 노인으로부터 자신을 죽여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는다. 죄책감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던 소영은 손 노인의 부탁들 들어준다. 그 일을 계기로 재우(전무송 역)와 종수(조상건 역) 등 사는 게 힘들어 죽고 싶은 고객들의 부탁이 이어진다.

경제적인 여유는 있으나 뇌졸중으로 쓰러져 평생을 병원에서 남의 손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하는 노인, 산동네 골방에서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 치매를 앓으며 서서히 망각의 늪으로 빠져드는 노인, 가족을 모두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에 삶의 의욕을 놓아버린 노인. 이 세 사람 모두 영화 속에 나오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노인들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겁다. 영화의 주인공 소영은 `죽여주게 잘 하는 여자'에서 `죽여주는 여자'로 본의 아니게 자살 조력자가 된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듯 우리나라는 세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급속하게 노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앞으로 10년 후쯤에는 65세 인구가 20%가 넘는 초고령사회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노령사회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OECD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 노인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와 함께 노인 우울증환자도 크게 늘어나고 있음이 반증이다.

급속한 고령 사회로 접어든 까닭에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과 직면하게 된 지금 하루 빨리 노인 연금 같은 노인 복지문제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와 조력 자살의 법제화에 관한 논의도 문제의 중심으로 들여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우울하고 힘든 일이지만 존엄한 죽음은 가치 있는 삶의 마무리이기에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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