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난징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김원봉’
중국 난징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김원봉’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9.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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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임시정부 사적지를 찾는 답사단의 일원이 되어 난징에 왔다. 난징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등장한 계기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계기로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 대표 였던 장제스와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의 난징면담 때부터이다. 이 면담에서 우리 독립운동 청년들의 군사교육을 중국이 맡게 되어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고, 우리 청년들이 입소하여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참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다. 나라도 없는 임시정부의 난민 같은 청년들을 92명씩이나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와 같은 최고의 군사 교육 기관에 무료로 교육시켜 준 것이다. 장제스는 미래를 보는 안목이 탁월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한민국의 독립을 확신했고, 21세기 세계를 움직이는 강국으로 발전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징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적지가 별로 없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찾아간 사적지는 아주 평범한 건물과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옛 난징 거리였다. 광복 이후 중국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이후 임시정부 관련 재산과 당시 중국 거주 한국인의 권리와 문제들을 담당했던 주화대표단 건물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영사관의 역할을 했던 의미 있는 건물이지만 당시의 관련 자료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념사진 촬영으로 만족해야 했다.

저녁 시간에 옛 난징의 거리인 고남경의 거리와 고준회 길을 관광차 나오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100여년 전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바쁘게 오가던 님들의 분주한 그림자를 발견하면서 나의 일탈은 시작되었다. 다음날 일행들이 점심을 먹는 시간에 나는 점심을 포기하고 택시를 타고 난징대학으로 달려갔다. 난징에 온 이상 반드시 만나야 할 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일본 국경일인 천장절에 일장기를 변소에 처넣은 사건으로 학교를 자퇴한 뒤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온 분이다.

의열단을 창설(1919년)하기 전인 1918년 아시아 최고의 명문대학인 이곳 금릉대학에 유학을 온 분이 약산 김원봉이다. 그 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서 레닌학교를 운영했고,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를 만들어 3기까지 수백 명의 한인 젊은이들을 독립운동 지도자로 육성하였다.

그리고 이곳 난징에서 의열단을 기반으로 민족혁명당을 창건하여 이끌었는데, 그 중심지가 바로 난징대학(구 금릉대학)이다.

후배인 봉명고 오탁근 선생과 함께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울창한 난징대학교 정문을 들어섰다.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셨던 여운형, 양기탁, 김원봉, 신익희 선생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고색창연한 옛 대학 건물 앞에 서니 광복을 위해 자신들의 꿈과 개인적인 욕망을 포기하신 선현들의 헌신과 노력을 알기라도 하듯 담쟁이덩굴이 붉은 벽돌을 휘감고 있다.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독립운동가 김원봉 선생의 조국에 대한 열정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 사회와 조국과 인류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인물로 키우는 교육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일행에게 누가될까봐 헐레벌떡 식당으로 달려가는 택시 안에서 후배 오 선생과 선열들의 희생에 누가 되지 않게, 부끄럽지 않게 역사 잘 가르쳐야겠다는 이심전심의 다짐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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