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격(格)
말의 격(格)
  • 임성재 <시민기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6.09.0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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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인도에서는 무엇이든 흥정을 해야 한다. 어떤 물건을 살 때나 릭샤나 택시 같은 운송수단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그것도 대충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는 부르는 값의 반을 더 깎아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는 확실하게 흥정을 하고 몇 번씩 값을 확인하고 타는 것이 안전하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돈을 지불하는 일은 금물이다. 처음에는 그러고도 목적지에서 딴 소리를 하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흥정이 끝난 후 서로 확인된 금액에 대해서는 그것을 바꾸지는 않는다. 물론 만면에 웃음을 띠며 팁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줘도 그만 안줘도 그만이다.

흥정을 할 때는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다. ‘friend(친구)’를 외치며 다가오는 인도상인의 작전에 넘어가면 덤터기를 쓰기 십상이다. 꼭 한집에서 사야할 물건이 아니라면 3군데 정도는 들러서 값을 확인하고 사면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가 부르는 값의 반이하로 불러보고 안되면 돌아서 나오는 척도 해보고, 상인이 안판다고 잡아떼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올려보기도 하지만 결국 흥정의 승자는 언제나 상인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손해보고는 안팔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의 이런 흥정과정은 유쾌하다. 인도식 영어와 한국식 영어(kongrish)가 단음절로 난무하지만 의사는 통하고 흥정은 이루어진다. 이런 경우 진지한 회화체영어보다는 핵심단어만을 연결하는 외침과 손짓발짓이 훨씬 생명력이 있다.

인도에서 10여일을 보내고 콜까타에서 택시를 흥정할 때였다. 전과 다름없이 흥정에 열중하고 있는데 이 기사는 값도 세게 불렀을 뿐만 아니라 너무 진지했다. 좀처럼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포기해야하나 하는 순간에 그가 말끝마다 ‘sir’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서야 그 ‘sir’가 들린 것이다. 인도에서 ‘sir’를 들은 것은 제법 비싼 식당을 찾아가 ‘징그리 말라이’라는 왕새우요리를 먹을 때뿐이었다.

택시기사가 진지하게 ‘sir’를 붙여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흥정은 깨져버렸다. 나 스스로 무장해제 되어 손을 들고 만 것이다.

결국 ‘sir’라는 말과 약 500인도루피 정도를 바꾼 셈이었다. 그러고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보였다. 검은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자신의 손님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 말하는 그의 말의 격(格)이 나의 격을 높여주는 것 같았다. 물론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 해도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통용되는 말들은 격(格)을 잃었다. SNS상에서 떠도는 이모티콘 같은 기호들이 이제는 국적불명의 말이 되어 청각을 자극한다. 고막은 울리는데 뇌에서는 해독을 하지 못하는 울림들이 공허하게 떠돌 뿐이다.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할 국회의사당에서 나오는 말들도 격(格)을 잃었다. 격을 잃은 말들은 소음에 불과하다. 국민들이 직접 선거로 뽑아주고 세금으로 세비를 주면서 국민의 심부름꾼으로 삼고자했던 국회의원들이 소음만 뱉어내고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말의 격(格)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결국의 우리의 격, 우리사회의 격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은 곧 사람이다. 그 말은 자신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의 격(格)까지 결정짓는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멈추게 하고, 사나운 말은 노여움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있다. 대화를 나누는 순간 너와 나의 주고받는 말이 우리의 격(格)을 단정 짓고 상황을 결정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듯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 사회의 격을 만들고 문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우리가 건네는 말 한마디는 더 조심스러워 질 것이다.

평소에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던 말의 격(格)을 인도의 택시 기사를 통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택시 기사의 ‘sir’하며 웃는 맑고 정중한 눈빛이 기분 좋게 기억되면서….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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