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지는 밤
모란이 지는 밤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6.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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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오월에 피었다 지는 모란은 예부터 부귀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는 또한 당(唐) 현종(玄宗)의 비(妃)였던 양귀비(楊貴妃)의 미모에 비견되던 꽃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모란은 계절적으로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기도 하다. 봄을 보내는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어느 봄꽃보다도 풍성하고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모란은 성숙한 여름을 대표하는 꽃으로 손색이 없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어느 날 저녁 모란이 지려는 것을 목도하였다.


모란이 지다(惜牧丹花)

惆愴階前紅牧丹(추창계전홍목단) 슬프다, 섬돌 앞 붉은 모란

晩來唯有兩枝殘(만래유유양지잔) 저녁 사이 두 가지만 남게 되었구나

明朝風起應吹盡(명조풍기응취진) 내일 아침 바람 불면 그것마저 지고 말 터

夜惜衰紅把火看(야석쇠홍파화간) 쇠락한 붉은 꽃 아쉬워 촛불 잡고 보노라



시인의 집 마당 섬돌 앞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었는데 5월 때에 맞추어 예의 그 소담스러운 꽃송이를 붉게 피우고 있었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그대로 피어 있겠거니 했던 모란꽃이 저녁을 지나면서 보니 달랑 두 가지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고, 나머지는 어느새 지고 말았던 것이다.

정작 모든 가지에 피어 있을 때는, 그렇게 눈이 가지 않았는데, 이제 꽃이 대부분 떨어지고, 두 가지에만 남게 되자 시인은 갑자기 모란에 애착이 갔다.

모란꽃은 부귀의 상징이지만, 그것은 시인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요염한 자태에 끌린 것 같지도 않다. 시인이 갑작스레 모란꽃에 애착이 간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모란꽃은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이십일까지 피어 있는 오월 꽃이지만 늦은 것은 6월까지 남아 있기도 하다. 이처럼 모란이 피고 지는 시기는 늦봄이자 초여름이다.

따라서 모란이 지고 있다는 것은 늦봄 내지 초여름이 가고 본격적으로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모란꽃은 봄의 지나감과 여름의 다가옴을 알려주는 시계인 셈이다.

시인은 모란꽃이 풍성하게 피어 있을 때는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무감각했지만, 다 지고 두 가지에만 꽃이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되자, 문득 시간의 흐름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러자 시인은 그 날 밤 시간을 평소처럼 잠을 자며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불을 켜들고 밤새 모란꽃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아쉬움을 섬세한 감각으로 묘사한 시인의 솜씨가 돋보인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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