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보약
여름 보약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6.0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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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여름은 자연의 생명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꽃은 이미 열매로 바뀌었고, 이 열매를 키우고 영글게 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게 바로 여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름 숲 속은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공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름 숲은 고요하기만 하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숲을 찾는 이유도 시원한 것도 있겠지만 고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요한 여름 숲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무엇일까? 당(唐)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이 그 답을 말해준다.


여름 낮 우연히 짓다(夏晝偶作)

南州溽暑醉如酒(남주욕서취여주) 남쪽 땅 찌는 더위는 술처럼 취하게 하니

隱几熟眠開北牖(은궤숙면개배유) 북창을 열고 책상에 기대 깊은잠에 빠진다

日午獨覺無余聲(일오독각무여성) 한낮에 홀로 깨니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데

山童隔竹敲茶臼(산동격죽고다구) 산속 시동이 대숲너머서 차 절구질을 한다



이 시는 시인이 남쪽 땅 유주(柳州)에 폄적(貶謫)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지금의 광서(廣西)에 가까운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여름 더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여름이면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지기 일쑤였다.

이러한 곳에서 여름을 나야 하는 시인에게 낮잠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보약이나 다름없었으리라.

이 날도 찌는 무더위에 시인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가, 그만 책상에 기대어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도 깊은 잠에 말이다. 때맞추어 챙겨 먹는 보약이라도 되는 듯이 시인은 여름 낮이면 낮잠을 청하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앉은 채로 한참을 자다가 문득 깨어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이 자기 혼자이고 또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름 낮 방 안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정적을 깨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인의 거처를 둘러싼 대숲 너머에 있는 절에서 나는 소리였다.

절의 동자승이 절구에 차를 찧고 있었던 것이다. 무더위에 취해 모두 낮잠이라도 자는 듯 조용한 여름 산속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시인의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다.

여름에 온갖 초목들은 열매를 맺느라 분주하지만, 사람들은 더위에 지쳐 술에 취한 듯 늘어지게 마련이다. 이때 필요한 게 바로 보약 아니던가?

이러한 의미에서 낮잠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름 보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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