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초여름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5.3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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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봄꽃이 하나 둘 떨어지고 그 자리를 진록의 잎사귀들이 차지하면, 이미 여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도 된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지만, 한낮은 이미 여름 느낌으로 충만하다.

여름 하면 뭐니뭐니해도 더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더위가 심하면 견디기 어렵지만, 초여름 더위는 아직 심한 것은 아니라서 견딜만할뿐더러, 어떤 때는 몸을 나른하게 하고 마음을 느긋하게 해주기도 한다.

이런 초여름 더위를 즐기기에는 낮잠만 한 게 없다. 고려(高麗)의 시인 곽예(郭預)도 초여름 낮잠의 유혹을 피할 수는 없었다.


초여름(初夏)

千枝紅卷綠初均(천지홍권녹초균) 온 가지에 꽃 지자 신록이 막 퍼지고
試指靑梅感物新(시지청매감물신) 푸른 매실 가리키니 감흥이 새로워라.
困睡只應消晝永(곤수지응소주영) 긴 낮을 보내기는 곤한 잠이 제격인데
不堪黃鳥喚人頻(불감황조환인빈) 꾀꼬리가 자주 사람을 불러 견딜 수 없네.



가지마다 매달려 있던 꽃들의 붉은 기운은 누군가 두루마리 말 듯 둘둘 말아 가버렸고, 대신 그 자리에 초록빛 물감이 골고루 뿌려지기 시작하였다.

나뭇가지가 붉은빛에서 녹색 빛으로 바뀐 것은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자연의 신호이다. 신호를 감지한 시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 매실이었다.

신기한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인은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가리켜 보았다. 그랬더니 그간 봄철에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것이 느껴졌다. 봄의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대신 여름의 느낌이 그 자리를 새롭게 차지한 것이다.

푸른 매실에서 여름을 느낀 시인의 뇌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낮잠이었다. 여름의 특징은 날이 긴 것이고, 이 긴긴 여름날을 보내는 데는 낮잠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낮잠을 청할 작정으로 평상에 누워 보았지만, 뜻밖의 훼방꾼이 등장했으니, 꾀꼬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꾀꼬리 울음 또한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이니, 낮잠의 훼방꾼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웬만한 감각으로 알아채기 힘들다.

무감각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계절이 바뀌었음을 느끼게 된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옮겨 갔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나뭇가지 색깔이다.

나뭇가지가 꽃의 붉은 빛깔에서 잎의 녹색 빛깔로 바뀌면, 여름이 온 것이다. 그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여름이 왔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비록 꾀꼬리 소리가 시끄럽다 해도 여름에는 낮잠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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