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나무 꽃
산딸나무 꽃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5.2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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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봄꽃은 보기가 좋다. ‘예쁘다’는 말이 아니다. ‘눈에 잘 띈다’는 말이다. 봄꽃은 잎이 채 나기도 전에 꽃이 피니 꽃이 돋보인다. 그래서 봄꽃은 홀로 자신을 자랑한다.

색도 화사하다. 진달래, 개나리처럼 붉은색, 노란색이 눈에 안 띌 리 없다. 하얀 꽃이면 큼지막하게 독야백백(獨也白白)하기에 눈에 확 띈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복수초(福壽草)만 하더라도 자세가 분명하다. ‘나 나가니 봄 길을 열어주쇼’라는 엘로 메시지(yellow message)를 명확히 담는다. 외산 꽃도 그렇다. 튤립도 유아독존(唯我獨尊)의 형상이다.

북미의 봄은 양귀비와 함께 온다. 하늘하늘 초원에 펼쳐 있는 양귀비를 보면 왜 그 꽃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는가를 알 것 같다. 다른 꽃도 구근(球根)이 많아 대쪽부터 올라오기에 잘 보인다. 수선화가 많다. 우리 문화권에서 수선화(水仙花)는 신선(神仙)의 이미지다. 산신(山神)이 아닌 수신(水神)일 따름이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자기도취의 나르시스트와 연결된다. 그런데 수선화를 ‘나르시서스’(narcissus)라 부르는 것은 대중적이진 않다. 워즈워드의 시에서처럼 ‘대포딜’(daffodil)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인다.

이렇게 봄꽃은 모두 화려하다. 자기 모습에 취해 물에 빠진 미소년이 환생한 꽃이라는 신화적인 설명처럼 아름답고 초월적이다. 선계에서 놀거나 아니면 경국지색의 얼굴이다. 아니면 튤립처럼 집 한 채 값이 넘는 투기의 대상이다. 진달래도 술을 담그거나 전을 붙여먹어야 시원할 정도로 내 마음속 바람을 부추긴다. 그래도 소박한 것이 개나리다. 자랑스러운 나리꽃을 못 피워 ‘개’ 나리다.

그래서 요즈음 나는 잎사귀가 무성해질 때 나오는 조용한 꽃이 더 궁금하다. 잎 때문에 자신을 보이지 못하고, 색도 그저 하얀 범범한 꽃이 반가워졌다.

5월 초에는 길거리 가로수로 이팝나무가 핀다. 꽃도 작고 색도 하얘서 그저 잡꽃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잔뜩 피어나면 꽤나 풍성하다. 5월 말 날씨가 더워지면 피는 꽃이 바로 산딸나무다.

산딸나무는 꽃이 단정하고 십자가 형태로 펴서 서양에서는 교회에 많이 심는단다. 그러나 서양이름은 ‘개나무’(dog wood)다. 꽃망울이 산딸기 같다고는 하지만 모양이 그렇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 그나저나 3~5센티 가량의 하얀 꽃이 사방으로 피어 있는 모습은 정말 만든 꽃처럼 균정함이 있다. 그리스 이후 서양인들이 치는 아름다움의 표준인 좌우대칭 곧 심메트리(symmetry)를 지녔다.

과연 이렇게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나무의 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내 답은 이렇다. 위에서 보라. 그 꽃이 향하고 있는 곳은 내가 아니라 해다. 그런데도 내가 내 키보다 큰 꽃을 바라보니 그 꽃의 아름다움이 온전할 수 없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서 산딸나무 꽃을 볼 때서야 그의 진가를 알아차릴 수 있다. 교회라면 종탑에서 볼 일이다.

우리가 땅 위에서 놀다 보니 하늘에서 내려 보아야 비로소 예쁜 꽃을 알게된다. 건방진 일이라고 사양하지 말고, 가끔은 산딸나무 꽃을 바라보듯 천상의 자리에서 지상의 사물을 볼 일이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높으신 분들도 그렇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꽃일지도 모른다. 불쌍하고 안 됐다. 밝은 5월, 해의 눈을 지니면 우리도 그들에게 사랑을 내릴 수 있으리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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