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배꽃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5.0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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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매화를 필두로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같은 꽃들이 봄의 초반을 장식하는 역할을 마치고 들어가면, 그때 등장하여 들판을 새하얗게 수놓는 꽃이 있으니 배꽃이 그것이다.

특히 봄밤의 달빛 아래 은은히 빛나는 배꽃의 자태는 가히 봄 풍광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밤의 은은한 모습과는 달리 해 밝은 낮에는 배꽃은 화사하다 못해 요염하기까지 하니, 배꽃은 밤이면 밤대로 낮이면 낮대로 그 매력을 사람을 향해 유감없이 발산한다. 송(宋)의 시인 소식(蘇軾)의 눈에도 어느 봄날 배꽃이 들어왔다.


동편 난간의 배꽃(東梨花)


梨花淡白柳深靑(이화담백류심청) : 배꽃은 엷게 희고 버들은 짙푸른데
柳絮飛時花滿城(유서비시화만성) : 버들개지 흩날릴 때, 꽃은 성에 가득하다
惆悵東欄一株雪(추창동난일주설) : 슬프다, 동쪽 난간에 핀 눈 같은 배꽃
人生看得幾淸明(인생간득기청명) : 사람은 일생에 몇 번 청명함을 볼까나



봄은 이제 더는 찾아온 손님이 아니다. 대지의 주인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무대에 처음 오르는 신인 배우들은 자신을 알리고자 다소 과장되고 튀는 모습을 연출하지만, 무대가 자기 집인 양, 낯설지 않은 중견 배우들은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무대에 임하고, 어떤 때는 도리어 자신을 숨기기까지 한다. 봄꽃도 마찬가지이다.

초봄의 꽃들이 울긋불긋 요란했다면, 무르익은 봄의 꽃은 담백하고 차분하다.

배꽃이 똑 그러하다. 가장 수수한 빛깔인 흰색이면서, 흰색 중에서도 엷은 흰색이니, 튀려 하기는커녕 도리어 숨으려고 하는 것이리라. 이처럼 은은한 배꽃이 필 무렵이면, 버들잎은 연록의 어린 태를 벗고 진청색의 성숙한 모습이 된다.

버들개지가 솜처럼 피어나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배꽃이 온 성에 가득 피어난 것은 봄이 무르익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무르익은 봄에 시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오도록 한 것이 있었으니, 동쪽 난간에 흰 눈을 뒤집어쓴 나무 한 그루였다. 만발한 배꽃을 한겨울 눈으로 본 것이리라.

시인의 탄식은 배꽃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가는 봄에 대한 아쉬움에서 나온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금처럼 청명한 날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 것인가?

봄은 아름답지만, 곧 지나가고 만다.

활짝 핀 꽃은 아름답지만, 지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탄에 잠기게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가는 봄이 더욱 아쉽기 마련이다.

배꽃이 초봄의 꽃들처럼 화려하지 않고 엷게 하얀 것은 아마도 봄을 배웅하는 그 역할 때문이라고 하면, 이는 억측에 불과한 것일까?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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