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봄비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4.1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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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봄비는 봄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어 초목을 소생시키고 꽃을 피우게 만드는 것도 봄비이고, 봄의 주인공인 꽃을 떨어지게 하는 것도 봄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봄비는 자연 경물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도 봄비는 특별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당(唐)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에게 봄비는 무엇이었을까?


봄비(春雨)

愴卧新春白袷衣(창와신춘백겁의) 새 봄에 흰 겹옷 입고 쓸쓸히 누워 있자니

白門寥落意多違(백문요낙의다위) 적막해진 백문거리 세상사는 뜻 같지 않네

紅樓隔雨相望冷(홍누격우상망냉) 홍루는 비 너머로 차갑게 보이는데

珠箔飄燈獨自歸(주박표등독자귀) 주렴속 흔들리는 등불만 저절로 돌아오네

遠路應悲春晼晩(원로응비춘원만) 먼 길 그대 응당 봄 저무는 것 슬퍼하리니

殘宵猶得夢依稀(잔소유득몽의희) 새벽에 오히려 희미하게 꿈꿀 수 있네

玉璫緘札何由達(옥당함찰하유달) 구슬 귀고리와 나의 편지 어떻게 보낼거나

萬里雲羅一雁飛(만리운나일안비) 만리 먼 곳 구름비단 타고 기러기 날아가네


새봄이 와서 세상은 온통 활기가 넘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시인은 실의에 빠져 대낮인데도 옷을 갖춰 입지 않고 방에 누워 있다.

그리고 사람들로 북적이던 백문(錦陵, 지금의 南京)거리도 적막하기만 하다.

아마도 세상일이 뜻한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지만, 마침 내리는 봄비 때문이기도 하다.

비를 사이에 두고 홍루(紅樓)가 보였다. 그곳은 비가 와서 그런지 무척 차갑게 느껴졌다.

어느덧 밤이 되자 주렴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등잔불만이 돌아와 있었다. 있어야 할 사람은 먼 곳에 가고 아무 소식도 없다.

그 사람도 먼 데서 이 봄이 저물어 가는 것을 응당 슬퍼할 테지만, 새벽이 되니 오히려 꿈속 모습마저 희미해지고 만다.

시인은 자신의 침울한 기분과 봄날이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을 봄비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그 사람에게 주려고 구슬 귀고리를 장만해 놓았고, 그에게 보낼 편지 또한 이미 써서 봉해 놓았지만, 보낼 방법이 없어서 답답하기 그지없는데, 시인의 뇌리에 환상적인 그림이 떠올랐다.

그 사람 있는 만리 먼 곳까지 구름 비단이 깔려있고, 그곳을 한 마리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의 간절함에서 말미암은 환상일 뿐이라서, 여기서 시인의 안타까움은 극에 이른다.

외로운 사람에게 봄비는 과연 무엇일까? 봄을 아파하는 사람에게 봄비는 아픔 그 자체이다. 어둡고 차갑고 거기다 꽃을 지게 하니 말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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