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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2.0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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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쥐
남 성 수 <논설위원>

언젠가 레밍이라는 예쁜 쥐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재미있어서, 또는 이상해서 웃어 넘겼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고 늘 새롭다. 얘기는 이렇다.

'나그네 쥐'라고도 불리는 이 쥐는 스칸디나비아의 산악지대에 주로 굴 속에 산다는데, 이상하게도 4년에 한 번씩은 수백만 마리가 한꺼번에 이동을 한다고 한다. 며칠을 걸어 바닷가 절벽에 다다라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파도 속으로 열을 지어 차례대로 몸을 던진다. 말하자면 집단 자살이다. 이 기이하고 끔찍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 세기 동안 과학자들이 몰두해왔고 마침내 그 '집단자살'의 이유가 밝혀졌다.

이유는 놀랍다. 그들이 사는 스칸디나비아의 자연조건에 비해 그들의 번식력이 너무 강해서 4년 정도가 지나면 먹을거리가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그들은 제 종족을 건강하게 보전하기 위해 스스로 너무 많은 자기 목숨들을 그렇게 과감히 버린다는 것이다. 비록 본능에 의한 행동일지라도 그것은 처절한 아름다움이다. 아니, 본능에 의한 행동도 그러할진대, 인간 사회의 삶과 균형은 그러한 본능을 얼마나 넘고 있을까.

동족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유전인자를 본능이라고 폄하하기 전에, 우리는 그 본능을 넘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 정의'에 대해 제대로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에게도 본능은 있고, 때로는 그 본능이 아주 인간적인 격식과 가치로 꾸며져 문화적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맛난 반찬 흰 쌀밥을 먹어도 혼자 돌아 앉아 먹으면, 여럿이 둘러앉아 보리죽을 먹는 것보다 맛이 없다. 이는, 우리 인간의 DNA 속에 수만 년을 같이 나누며 먹어온 정보가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인 동시에 인간만의 문화적 가치라고도 할 수 있다. 맞다. '혼자 잘살믄 무슨 재민겨!'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 산업화 40년 만에 우리 사회는 수백 만 년의 인간 본능도 바꾸어 버렸는지, '혼자 잘 사는 재미'에 온 나라가 취해 있다. 또한 그 '재미'를 다칠까봐 광기어린 증오를 쏟아낸다.

몇 억, 몇 십억원씩 자고나면 노다지를 긁는 수도권 아파트를 중심으로, 노다지를 캐는 1% 사람들은 세금 서푼 오른 것에 '폭탄'이라고 엄살떨고, 서민들은 폭탄 맞을 자격이 없어 절망한다. 어디로부터 문제인가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작년 8월 기준으로 무려 105.9%이다. 한 가구가 한 개의 주택을 소유한다면 약 72만여 채가 남는다. 그런데도 국민의 41%인 1700만 명은 집이 없다. 집을 더 짓고 신도시를 만들어 보아도, 오히려 집값은 더 뛴다. 왜냐하면 새로 짓는 집을 구입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은행담보 능력이 있는 지금의 집 부자들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어렵지 않다. 당연히 다주택 소유자들에게 소유가 불편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세금정책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상식적인 정의이다.

20세기 정의의 철학자 존 롤스는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 유리한 위치를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위해 사용할 때에만 정의로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도 보수신문들은 세금에 대해 증오를 쏟아낸다. '세금폭탄'이라고, 납세 저항이 있을 것 같다고 선동한다. 정의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오늘도 저 스칸디나비아 어느 굴 속에서는 함께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을 느낀 레밍 쥐들이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본능이라고 하자. 그러나 우리는 나눔과 배려 정도는 제도화할 수 있는 인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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