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의 나라' 한국의 성곽과 청주 정북동 토성
`성(城)의 나라' 한국의 성곽과 청주 정북동 토성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6.02.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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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우리나라를 ‘성의 나라’라 부를 만큼 전국 방방곡곡에 수많은 성곽이 존재하고 있다. 성(城)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사기’의 고조선 침입 기사에서 처음 보인다. BC 108년 고조선이 한나라의 대군을 맞아 평양성에서 1년 가까이 맞서 싸웠다. 고조선 때의 평양성 터는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이상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튼튼하게 쌓인 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후 삼국이 건국되고 각 나라는 주변으로 땅을 넓혀 가며 나라마다 전쟁을 벌이게 된다. 특히 고구려는 ‘성곽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넓은 영토를 지키고자 많은 성을 쌓았다. 외적이 침략해 올 때는 모든 백성이 이 성에 들어가 함께 적을 막았기 때문에 중국의 수, 당과 같은 엄청난 대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서울의 풍납동 토성은 지금까지 한강 남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성이다. 상당히 두텁게 쌓인 퇴적층을 제거하면서 초기 백제의 건국으로부터 한성시기의 겹쳐진 유적들이 확인되었다. 백제는 이러한 토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고구려, 신라와 전쟁이 계속되는 4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돌로 쌓은 석성이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63년 청주의 옛 이름인 낭자 곡성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청주가 실제 백제의 영토가 되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그렇지만 청주 지역에서는 이후에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면서 점차 백제의 지배체제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대부분 성곽은 산성이고, 석성인데, 정북동 토성은 평지에 남북이 약간 긴 형태의 네모꼴로 쌓은 토성이다. 발굴조사와 방사선 탄소 연대측정 결과, 2~3세기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는데, 중국, 혹은 낙랑의 영향을 받아 네모꼴의 형태로 쌓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매우 이른 시기에 어떻게 청주 지역에 중국의 영향을 받은 성을 평지에 쌓은 것일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성벽은 높이가 2.7m~4.5m, 성벽의 아랫부분은 12.5m~17.5m, 윗부분은 폭이 2m 정도다. 성벽의 길이는 동벽이 185m, 서벽이 165m, 남벽155m, 북벽 170m, 전체 675.5m의 비교적 규모가 크지 않은 토성이다. 성벽은 진흙과 모래를 교대로 쌓아 상당히 튼튼하게 만들어졌는데 18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성벽을 쌓는 방법은 약 1m 너비의 나무 기둥을 박고 안쪽에 나무판자를 대고 차례차례 흙을 다지면서 성을 만들어 갔다. 성 바깥에서는 매우 넓은 물구덩이가 발견됐는데 이를 해자라고 부른다. 성벽 바깥으로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워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시설이다. 북문과 남문은 성벽을 엇갈리게 쌓아 침입한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시설도 마련되었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만큼 성을 높게 쌓아 바깥을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성에 접근하는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청주를 역사적인 고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 바로 정북동 토성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사적 415호 정북동 토성은 서울의 풍납동 토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밝혀져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우리 고장의 역사성과 전통이 서려 있는 자랑스러운 정북동 토성을 더욱 소중하게 관리하고 계승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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