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경치
눈경치
  • 김태봉 <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6.02.0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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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겨울에 눈이 없다면,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얼마나 마음이 움츠러들까? 그리고 낙엽마저 사라진 산야는 얼마나 삭막할까?

자고 일어나서 방문을 열었을 때, 마당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포근함과 순결함과 풍성함을 느끼곤 한다.

산과 들을 하얗게 덮어버린 눈을 보면 사람들은 대자연의 장엄함에 숙연해진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눈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였던 조선(朝鮮)의 시인 김삿갓(炳淵)은 산을 뒤덮은 장엄한 눈 풍경을 보고도 특유의 해학 기질을 유감없이 발동하였다.





눈경치(雪景)



天皇崩乎人皇崩(천황붕호인황붕) 천황씨가 죽었나 인황씨가 죽었나

萬樹靑山皆被服(만수청산개피복) 나무와 청산이 모두 상복을 입었네.

明日若使陽來弔(명일약사양내조) 밝은 날에 해가 찾아와 조문한다면

家家檐前淚滴滴(가가첨전누적적) 집집마다 처마 끝에서 눈물 뚝뚝 흘리겠네




세속적 관점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는 뭐니뭐니해도 황제일 것이다. 시인의 말로는 황제는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

이 존귀한 존재인 황제가 죽는(崩) 일처럼 슬픈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고, 그래서 그분의 자손인 온갖 나무와 푸른 산에게 모두 상복(喪服)을 입힌 것이 설경(雪景)이라고 시인은 너스레를 떤다.

상복(喪服)의 빛깔이 하얗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를 끌어온 것이겠지만, 산에 눈이 쌓인 모습을 슬픈 이미지의 상복(喪服)에 빗대는 발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칫 시의 분위기가 침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 어디에서도 침울함을 찾아볼 수 없다.

누가 보아도 금세 눈치 챌 수 있는 과장법의 구사로 침울함은커녕 유쾌한 웃음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과연 해학과 풍자의 천재 김삿갓이다.

시인의 눈경치에 대한 해학적 접근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고 있다.

하늘과 땅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세상을 떴으니, 거물들의 문상(問喪)이 줄을 이었을 것이고, 그중에는 거물 중의 거물 해도 포함돼 있었다.

그 해가 나타나자 그것을 신호로 하여 집집마다 일제히 처마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곡(哭)을 한다.

눈 쌓인 데 해가 떠서 눈이 녹는 모습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마치 한편의 동화(童話) 같은 설정으로, 눈이 쌓이고 녹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려낸 시인의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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