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을 위하여(1)-소통, 말이 통하는 세상
진정성을 위하여(1)-소통, 말이 통하는 세상
  • 정규호<문화기획자>
  • 승인 2016.01.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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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 정규호

내가 항상 책상에 올려두고 참고하는 국어사전에는 ‘불가역적’이라는 단어가 없다.

다만 ‘불가역 반응’항목의 역반응이 일어나기 어려운 반응이라는 뜻풀이와 더불어 화학적 용어임을 명기하고 있다.

사전전문 출판사임을 내세우면서 15만여 단어를 수록했고, 2007년에 제6판으로 발행된 것이니 그럭저럭 쓸 만한데 요즘 부쩍 반복되어 인구에 회자되는 단어가 누락되다니….

하여 책꽂이에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춰봤다. 비록 1999년에 구입한 사전이지만 국립국어연구원이 발간한 것이고, 한 권의 두께가 6천 쪽을 넘나드는 세 권짜리 방대한 규모의 국어사전의 체면치레인지 ‘불가역적’이라는 단어가 당당히 있다.

불가역적(-的) : 본래의 상태로 돌아오지 아니하는, 또는 그런 것이라는 뜻풀이와 더불어 ‘불가역’이라는 단어를 ‘비가역’에서 찾아봐야 하도록 유도한다.

비가역은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맺힌 한이 너무도 많은 위안부 문제가 12·28이후로는 돌이킬 수 없는, 따라서 모든 것이 (화학적으로)끝났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게다가 국어사전의 뜻을 감안하면 굳이 ‘불가역적’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위안부문제를 다분히 물질적인 것으로만 봤다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냥 쉽게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거나, ‘(위안부 문제는) 종결로 합의됐다’로 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연극 대사의 종류는 독백과 방백, 대화가 있다. 독백과 방백은 구별이 쉽지 않은데, 무대 위에 상대배우가 있고 없음이 가장 큰 차이이다. 둘 다 혼잣말이긴 한데 상대방은 듣지 못하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이 방백이라면 독백은 그저 관객만 알아듣는 경우를 말한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부탁해요 엄마’에는 지금까지의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독백과 방백의 경계를 넘나드는 혼잣말의 경우가 그것인데, 가족에게 비수에 가까운 모진 말을 함부로 한 뒤, 사랑과 존경, 더 나아가 효심이 담긴 가슴속 진정을 혼자 되뇌는 경우다.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으니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자꾸만 빗나가고, 어그러지는 관계가 비일비재한 세상이니 그나마 말하기 편한 가족에게는 오죽하겠는가. 그런 애절한 진정성이 드라마에서 거듭되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다.

새해가 시작됐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진정성 없는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차분하게 속마음을 전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빗나가고, 또 아무도 그런 진지함을 알아차리거나 가슴에 담아두려는 배려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눈앞의 감언이설이거나 뻔한 임기응변, 그리고 가벼움에 현혹돼 편하게 촐랑거리는 세상을 쉽게 받아들인다.

북핵을 비롯해 위안부 문제,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이전투구와 이를 부추기듯 즐기는 언론, 아무 자리에서나 함부로 지껄여 대는 루머, 그리고 막무가내의 세대 갈등 등 도대체 ‘인간에 대한 예의’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다.

진정한 정의가 가장 먼저인 세상, 진심을 쉽고 편하게 말함으로써 소통하는 세상이여 어서 오라. ‘불가역적(不可逆的)’이 ‘불가(不可)’하면 역적(逆賊)으로 여겨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진정한 소통이 없으면 미래도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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