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에서
겨울 숲에서
  • 정규호 <문화기획자 ·칼럼리스트>
  • 승인 2015.12.2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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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겨울 한적한 숲에서 홀로 하늘을 봅니다.

성긴 가지 사이로 그물처럼 드리워진 시퍼런 하늘이 서늘합니다.

차가운 바람이 이어지는 겨울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쏟아낼 듯 잿빛이었다가 청명한 파란 빛깔로 뒤바뀌는 듯 변화무쌍합니다.

고즈넉한 겨울 숲속에서 내 서러운 한 해가 또다시 저물어갑니다. 겨울 숲에서, 헐벗은 나무들에서 세상 이치를 살펴봅니다.

늦가을 떨 켜를 준비하는 나무들은 제 스스로 살아가는 일에만 골몰하지는 않습니다. 낙엽이 질 무렵 잎자루와 가지가 붙은 곳에 떨 켜라는 세포층을 만드는 나무들은 여름내 부드러웠던 제 스스로의 몸을 경직시킵니다. 수분이 통하지 못하게 하여 얼지 못하게 하고 잎새가 떨어진 상처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이지요.

만약 나무들이 푸르던 잎을 떠나보내지 않고 무성한 상태로 겨울을 맞는다면 우리의 겨울은 훨씬 더 모질 것입니다. 이리저리 제멋대로 불어젖히는 삭풍에 견디지 못해 흐느끼듯 마구 흔들리는 무성한 나무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추위에 대한 사무침은 뼛속까지 치달아 더 힘겨운 겨울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한몸이던 나뭇잎을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맨 가지로 북풍한설을 맞는 나무들은 어쩌면 제 몸 구석구석 바람을 스쳐지나게 하며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몸으로 휘날리거나 떨리는 모습을 감추는 겨울의 또 다른 이미지입니다. 그런 나무들에서 사람들은 그만큼의 떨림을 덜 느끼게 되는 그런 겨울입니다.

참 많은 일이 거듭됐던 한 해였습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일년 내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거라 여길 만큼 풍요롭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이웃들은 노상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청년실업이거나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궁핍한 손으로 맞아야 하는 노년의 서러움,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아직 창창한 세월과 열정에도 직장에서 쫓겨나야 하는 서러움에 떨리는 한 해를 근심으로 채우고 있겠지요.

2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아직 컴컴한 바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세월호 피해자들의 서러움은 가실 줄 모르고, 어렵사리 청문회가 열리던 날. 야당 정치인들은 혈안으로 제 몫 챙기기에 나서면서 애꿎은 백성의 관심을 싸움 구경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알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느닷없는 물대포에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는 늙은 농부의 기막힌 한(恨)이 현실의 민주주의일 터이고, ‘금수저’와 ‘헬 조선’의 틈바구니에서 삭아가는 이 땅의 청춘들은 우리 모두의 고통일 따름입니다.

또 한 해를 보내면서 세상에 넘쳐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그저 생각만 합니다. 세상에는 나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고통을 모르는 체 하면서 외면하고 있는지요.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 숲에 서면 몸이 먼저 반응하여 움츠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떨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나무들의 처연함에서 우리는 어쩌면 깃발의 힘찬 나부낌을 기다리는 줄도 모릅니다.

나무의 의연함을 사람이 미치지 못하니, 차라리 시 한 수로 위로합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중략)/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유치환. 깃발)

숨죽여 사는 나무와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을 닮은 새 날, 새해를 기약하며 겨울 숲에도 봄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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