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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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12.1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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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부산의 광안대교 앞에서 오늘 말하고자 한 것은 걷는 다리(脚)가 아니라 건너는 다리(橋)다.

그런데 제목을 걸어놓고야 비로소 ‘다리’에 두 뜻이 있는 것을 깨닫는다.

내 몸에 붙어 있는 두 다리도 다리지만,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도 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왜 그럴까? 나도 영 모르겠다.

사람 다리는 두 개로 앞뒤를 잇는다. 그런데 개울가 다리는 그런 다리가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하다못해 엉성하게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는 그저 돌을 건너 건너 놓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리라는 말이 형태를 보고 연상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기능 쪽이 아닐까 의심이 간다.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것은 무조건 다리라는 말을 붙여줘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말에서 다리는 ‘꼴’을 중심으로 뜻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일’을 중심으로 뜻을 함께 하고 있는 것 같다.

진천에는 농다리가 있다. 국어학자는 그것의 다리가 농 모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지네처럼 보인다는 농(?) 설과 상반된다.

나는 당연히 농짝 이야기를 지지한다. 한자를 어원으로 보는 너무 많고 너무 쉬운 어원설은 식상할 뿐만 아니라 현재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고자 하는 지나친 현상론이기 때문이다. 2천년의 세월을 버틴 돌다리의 위대함은 농처럼 생긴 구조물의 강건함에 있다. 비록 오늘날 정말 지네처럼 휘긴 했어도 농 같은 다리 덕분에 아직도 멀쩡하다. (예민한 독자는 느꼈을 테지만 ‘그것의 다리’ 또는 ‘농 같은 다리’라고 말할 때 ‘다리의 다리’라는 표현이 숨겨있었다. 기능의 다리에 형태의 다리를 함께 말하는 이 얄궂음을 용서해주길!)

나는 이런 다리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늘 감동받는다. 인류가 만들어낸 작품 가운데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예술적인 것이 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정한 작품이 아닌 보편명사로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다리는 진정 특출하다는 것이다.

보자. 농다리는 기본이고 많은 절에 있는 극락교를 보자. 차안과 피안을 잇는 상징물이기 때문에라도 그렇겠지만 정말 많은 공을 들인 작품들이다. 선암사 무지개 돌다리는 위에서는 잘 모르지만 내려가서 바라보면 정말 아름답다. 그것을 생각하며 다리를 건너면 이상향으로 건너가는 흥취가 더 해진다. 송광사에는 지붕이 있는 다리로 개울을 건넌다. 앉아 쉴 수도 있다. 비가 오는 날 건너면 왜 지붕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경주에도 최근에 지붕이 있는 옛 다리를 복원했다. 이 월정교를 짓기 위해서 들인 돈과 시간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해도 과거에 신라의 국력이 어떠했는지를 쉽게 상상하게 한다.

사람이 다닌 곳에는 길이 생긴다. 그런데 그 길이 끝나야 하는 곳에 사람들은 다리를 놓는다. 길은 단어 그대로 본다면 사람이 만든 것이니 ‘인위’(人爲)적이긴 하지만 동물도 자기들 다니는 길이 있다는 점에서 길은 인위와 자연 사이에 있다. 그러나 다리는 분명히 인위적인 산물이다. 자연에 인간적인 구조물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목학자에게 건축과 토목의 차이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지붕이 없으면 토목이고 있으면 건축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다리는 토목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지붕 있는 다리는 그렇다면 토목의 영역인가, 건축의 영역인가?

언젠가는 한국의 다리만을 연구해보고 싶다. 고유섭이라는 한국미학자가 탑을 통해서 한국의 기박(氣迫)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그릇도 탑도 예술품이 되었지만 다리는 아직 아닌 것 같아 그런다. 또한 다리는 그 자체로 ‘너와 나를 잇는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너무나도 사회적인’ 소통의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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