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바다를 꿈꾸며 적성을 넘은 신라의 기상
대망의 바다를 꿈꾸며 적성을 넘은 신라의 기상
  • 김명철<청주 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12.1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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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적성산성은 산의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동서로 긴 배 모양으로 생긴 산성이다. 산성의 끝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한강이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내 달리고 있다. 힘차게 내달리는 남한강은 바다까지 내쳐 항해할 듯 돛을 올려 한껏 부푼 신라인의 기상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실제로 신라는 적성산성을 쌓은 이후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에 진출하는 꿈을 이루게 된다. 새로 단장된 성벽을 따라 동북쪽 치성에 올라서 한강을 보면 성벽 바로 앞으로 남한강이 흘러가는 듯 착각하기도 한다.

성벽이 무너져 내려 얼핏 토성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적성산성은 신라 진흥왕 때 축성된 산꼭대기를 둘러싼 형태의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적성산성에 서면 날이 선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6세기 이후 세력이 강해진 신라는 고구려를 압박하게 되고, 반대로 내부의 분열과 돌궐의 침입으로 세력이 약해진 고구려가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한강유역을 공략하면서 충북의 북부지역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성벽 중 강쪽의 성은 인공을 거의 가하지 않은 자연석으로 안팎을 포개고 엇물려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성의 둘레는 923m이며 성안의 지형으로 인해 성안의 물은 모두 동남쪽의 낮은 지역으로 모여들어 한 개의 배수구에 모두 처리될 수 있도록 하였다. 성안에서는 신라시대의 기와나 토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며 고려시대의 토기와 청자 기와 조각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대략 고려 말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쪽의 높직하고 평평한 곳에 단양적성비가 있다. 현재 사방 한 칸의 팔작지붕으로 세워진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는 이 비는 높이 93㎝ 정도로 그리 크지 않으며 머릿돌이 없고 아랫부분 끝이 좁은 것으로 보아 받침돌에 꼽는 형식으로 세워졌던 것 같다. 세 조각으로 갈라진 비석 중 현재 두 개가 발견되었는데 400여 자의 글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이다. 비문에는 왕의 교시, 당시 법령제도에 따른 호적기재방법, 이 지역을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 야이차에 포상을 내린다는 내용을 통한 새 영토의 주민에 대한 회유정책, 지명, 인명, 관직명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관들에게 교시를 내려 포상을 하도록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 땅을 점령한 다음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세운 전승기념비로 볼 수 있다. 적성비는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성산성은 남쪽으로 죽령, 북동쪽으로는 영춘과 영월, 북서쪽으로는 청풍·충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적성산성은 경상도로 넘어가는 죽령의 아래쪽 길이 보이고, 서쪽은 금수산, 남쪽은 소이산 봉수대, 북쪽은 영춘의 온달산성과 이어진다. 적성산성 양옆으로는 단양천과 죽령천이 감싸 흐르고 정면에는 남한강이 흐르는 천혜의 요지로서 죽령을 넘어온 신라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다. 결국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할 수 있었고 마침내 삼한일통의 꿈인 삼국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죽령을 넘은 신라의 기상이 대망의 바다를 꿈꾸며 북으로 내달렸던 것처럼 오늘도 남한강은 그렇게 신나게 통일 한국을 향하여 북으로 내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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