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산속
늦가을 산속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11.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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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늦가을의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산 속일 것이다. 늦가을의 주인공은 낙엽이고, 온갖 나무들로부터 떨어져 내린 낙엽이 쌓인 곳이 산 속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무마다 고유의 빛으로 도도한 자태를 뽐내던 터였지만, 이제는 한껏 몸을 낮추어 대지에 나란히 눕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고 늦가을 산 속에 낙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늦가을 특유의 여러 풍광들이 어우러져 있지만, 그 모두가 낙엽과 절묘한 앙상블을 형성한다. 당(唐)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은 늦가을 새벽 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응시하고 그들과 교감하였다.


가을 아침 남곡으로 가며 황촌을 지나다(秋曉行南谷經荒村)



杪秋霜露重(초추상로중) : 늦가을 서리와 이슬 짙은데

晨起行幽谷(신기행유곡) : 새벽 일어나 깊은 골짜기로 가네

黃葉覆溪橋(황엽복계교) : 누런 단풍잎 계곡 다리를 덮고

荒村惟古木(황촌유고목) : 사람이 떠난 고을에는 오직 고목만 남았네

寒花疎寂歷(한화소적력) : 겨울꽃은 드문드문 적막하고

幽泉微斷續(유천미단속) : 깊숙한 샘물 가늘게 끊겼다 흘렀다 하네

機心久已忘(기심구이망) : 속된 마음은 잊은 지 오래이니

何事驚糜鹿(하사경미록) : 무슨 일로 사슴을 놀라게 하리오




나무를 타고 오르던 가을은 마침내 가장 높은 가지의 끝(?)에 다다랐다. 그래서 초추는 늦가을 중에서도 늦가을인 셈이다.

늦가을도 막바지에 이르면 서리와 이슬은 한층 더 짙고 두텁게 된다. 이처럼 짙은 서리와 이슬이 내린 늦가을 새벽, 시인은 침상에서 일어나 깊은 골짜기를 찾아 나섰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도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을 테고, 늦가을의 정취는 새벽 산속이 제격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도착한 깊은 산속 골짜기는 과연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려는 시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선 눈에 띈 것은 역시 낙엽이었다. 누렇게 시들어 떨어진 나뭇잎들이 계곡의 다리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다리는 떠나감의 공간이고 낙엽은 늦가을의 상징이니, 이는 늦가을이 떠나가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계곡 다리를 지나니 황폐한 마을이 나타났다.

사람은 모두 떠나 아무도 없고 오직 고목만이 쓸쓸한 모습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 역시 떠나감의 모습을 보여준다. 추위에도 피어있는 꽃이 있긴 하지만 매우 성긴 것이 적막감마저 감돈다. 깊은 산속에 숨어있는 샘은 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끊어졌다 이어졌다.

모두가 떠나가고 사라지는 늦가을의 쓸쓸한 모습들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을 돌아다 본다. 세속적 명리를 좇는 속된 마음을 잊고 자연의 하나가 되어 산 지 오래니, 숲속의 사슴이 시인을 보고 놀랄 일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사슴을 놀라게 했으니, 아직도 기심(機心)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늦가을 새벽에 깊은 산속을 찾아보라. 거기에 가면 늦가을의 온갖 정취가 모여 있을 것이다. 수북이 쌓인 낙엽들을 위시해 모두가 떠나고 사라지는 쓸쓸한 모습들이지만, 거기에서 자연의 섭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명리에 얽매인 속된 마음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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