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 불평 또한 평등하지 않은 세상
불평등 · 불평 또한 평등하지 않은 세상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5.11.0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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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 정규호

미안하지만 개천에서 용이 나고, 그 용이 집안을 들불처럼 일으킬 것을 욕망했던 어르신들의 시대는 이미 흘러갔다.

학·지·혈의 끈적끈적하고 절대 풀어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던 3연의 관계, 그중 특히 혈연을 통해 세력을 키우려는 시도는 더 이상 기대하기도 성공하기도 어려운 세태다.

연(緣)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철옹성처럼 차지하는 것은 ‘줄’과 ‘숟가락’인데, 최근 들어 부쩍 회자(膾炙)하는 ‘금수저’와 ‘탯줄’에 대한 부러움의 탄식이야말로 가장 생생한 상징이 되겠다.

줄과 수저로 구분되는 새로운 관계의 시대는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3연의 시대보다 훨씬 선택의 폭이 비좁은데다 일방적이고, 다른 부류에는 아예 끼어들 틈조차 허용되지 못할 만큼 절망적이다.

오죽하면 ‘세상의 어떤 줄 가운데 단연 으뜸은 탯줄’이라거나, 먹고살기의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숟가락마저 금수저이거나 아예 흙 수저로 극명하게 차별하면서 청춘의 무리가 좌절하는 세상이 됐겠는가.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불평등의 단초가 (스스로의)선택의 여지가 없는 태생적 차이와 차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원망하게 되고 마는 현실은 말 그대로 분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의 청춘 대부분을 좌절하게 하는 불평등이 우리가 쉽게 원망하고 시기하는 ‘탯줄’이거나 ‘태어나면서부터 물고 나온 금수저’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열풍을 만들어가는 노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갈수록 커지는 부의 불평등의 심화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체제 자체가 위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상속받은 자본의 불평등이 소득의 증가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 자본의 증가 속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동생산성이 소득의 증가로 이어지는 경제 원론이 무색할 만큼 금융자본을 통한, 즉 직접적인 생산 활동보다는 소위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왜곡이 자본주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인 셈인데, 그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직시(直視)가 경이롭다.

그러나 그런 피케티의 불평등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불평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으니,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책 의 한국어판 번역본의 왜곡 논란이 대표적이다.

성장과 분배의 상반된 가치체계를 둘러싸고 불평등에 대한 근원적인 처방과 인식 대립각의 구도로 대치시키려는 시도는 그러나 미국의 원출판사로부터 (한국어판 번역본을)전량 회수해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학자적 양심과 출판의 명예가 무너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면서까지 불평등을 불평하는 세력이 ‘탯줄’ 혹은 ‘금수저’의 부류이거나, 아니면 좌절하는 대다수의 청춘이거나의 차이에 대한 명백한 구분은 두루 마땅치 않다.

프린스턴대 출판부의 지적대로 “<위대한 탈출>의 한국어 번역판이 원전에 변경을 가했으며, (저자의 의도와 달리) 이 책을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반하는 위치에 두려는 한국 경제학자의 서문이 포함된 채로 출간됐다”는 지적에 이르면 불순한 의도가 엿보인다.

하물며 역사는 더더욱 특정한 세력을 대표할 수 없는 일. 제멋대로 번역하고 편집 재단되는 책은 역사이거나 경제이거나 언제나 불편하고 불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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