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책
가을 산책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10.1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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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가을은 봄에 비해서 화사함은 떨어지지만 차분함은 확실히 앞서있다. 맑은 가을 날 한적한 시골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을 정취에 빠져들고, 차츰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의 가을 소풍을 따라가 보면 차분한 가을 정취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망천에서 한가하게 살면서 배수재에게 드립니다(輞川閑居贈裴秀才迪)


寒山轉蒼翠(한산전창취):차가운 가을 산이 검푸르게 변하고

秋水日潺湲(추수일잔원):가을 물은 날마다 졸졸 흐른다

倚杖柴門外(의장시문외):지팡이 짚고 사립문 밖에 나아가

臨風聽暮蟬(림풍청모선):바람 쏘이며 저문 매미소리를 듣는다

渡頭餘日(도두여낙일):나룻가에 지는 햇살은 남아있고

墟里上孤煙(허리상고연):작은 마을에는 외로운 연기만 피어오른다

値接輿醉(부치접여취):다시 접여처럼 술이 취하여

狂歌五柳前(광가오류전):오류선생 집 앞에서 미친 듯 노래부른다



맑은 가을 늦은 오후 집안을 서성이던 시인의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것은 멀리 보이는 산이었다.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산은 차츰 검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산 색이 하루가 다르게 녹 빛에서 검푸른 빛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시인은 가을이 왔음을 직감한다. 변한 것은 산색만이 아니다. 물의 흐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여름 내내 거칠게 콸콸 흐르던 물이 하루하루 다르게 잔잔해진 데서 시인은 다시 한 번 가을을 실감한다. 이에 몸이 근질근질해진 시인은 지팡이 하나를 챙겨들고 사립문을 나섰다.

가을 산책에 나선 것이다. 문 밖을 나선 시인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가을바람을 쏘이는데 어디선가 저녁 매미소리가 들려온다. 가을이 깊어 감을 아쉬워 우는 매미소리가 구슬픔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매미 소리의 여운을 귀에 간직한 채, 시인의 시선은 자연스레 나룻가 쪽을 향하였다. 그곳에는 하루를 마감하고 서쪽으로 저무는 해가 걸려 있었다. 나루는 나그네가 떠나가는 이별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 곳엔 늘 아쉬움과 미련의 정이 남아있기 마련인데, 오늘의 나그네는 바로 석양이다.

떠나기가 아쉬운 듯 저녁 해는 노을을 벌겋게 여운으로 남겨 놓았다. 지는 해의 여운을 품은 채 시인의 눈은 이웃 마을로 그 시선을 옮기어 간다. 그 곳에는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저녁 모습이기도 하지만 하루의 마감을 알리는 봉화(烽火)불 같기도 하다. 가을의 저녁 정취에 흠뻑 빠진 시인은 은거(隱居) 생활의 즐거움과 낭만을 만끽해 본다. 술에 취해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춘추시대의 은자(隱者) 접여(接輿)와 집 앞에 다섯 그루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하였던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 흉내를 내면서 말이다.

가을의 정취는 쓸쓸해 보이기 쉽지만, 욕심 없이 사는 담백한 맛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은자(隱者)의 분위기와 닿아 있다. 가을의 나룻가에 걸려 있는 석양, 소박한 시골 마을 저녁에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기, 이런 것들이 곧 삶의 정취 아니던가?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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