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외로움
가을밤, 외로움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9.1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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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풀잎 위에 이슬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백로(白露)가 지나고 나면 철은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든다. 촉촉하고 정갈한 느낌으로 다가 오는 이슬은 가을밤의 정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존재이다. 가을밤 하늘에 밝은 달이 있다면 땅에는 촉촉하고 정갈한 이슬이 있다. 달과 이슬의 가을밤이면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는 경향이 있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도 예외는 아니었다. 

달밤에 아우를 생각하다(月夜憶舍弟) 

戍鼓斷人行(수고단인항) 수자리 북소리에 인적은 끊어지고 
秋邊一雁聲(추변일안성) 변방의 가을에 외기러기 우는 소리 
露從今夜白(노종금야백) 이슬은 오늘밤부터 하얗게 내리고 
月是故鄕明(월시고향명) 이 달은 고향에서도 휘영청 밝으리 
有弟皆分散(유제개분산) 동생들 있으나 다 흩어지고 
無家問死生(무가문사생) 생사를 물을 집도 없다네 
寄書長不達(기서장부달) 편지를 부쳐도 길이 멀어 닿지 못하거늘 
況乃未休兵(황내미휴병) 하물며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음에라야 

※ 변방을 지키는 수자리에서 저녁 통금을 알리는 북이 울리자, 간혹 있던 사람들 발길이 아예 끊어지고 말았다. 지금 시인이 있는 곳은 변방 어느 곳이고, 시간은 가을 어느 때이다. 사람들 왕래마저 끊어져 땅은 적막하기 그지없는데, 하늘은 꼭 그렇지가 않다. 기러기 한 마리가 날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하늘을 나는 외기러기는 사람 구경을 할 수 없는 시인에게 일견 반가운 존재일 테지만, 한편으로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외기러기는 가족으로부터 홀로 떨어져 타지를 헤매는 시인 자신의 외로움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기러기가 촉발시킨 시인의 외로움에 불을 지른 것은 가을밤의 두 주인공, 이슬과 달이었다. 어쩐지 땅이 축축하여, 절기를 헤아려 보니 세월은 훌쩍 흘러, 오늘이 마침 이슬이 하얗게 내린다는 백로(白露)였다. 고향 땅에도 어김없이 이 이슬은 내렸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저 밝은 달은 고향 하늘에도 휘영청 떠 있을 터였다. 이제 시인의 뇌리는 자연스레 고향과 가족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다. 형제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내왕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한 때는 가족들이 오순도순 단란하게 함께 모여 살던 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사라져 가족들의 생사조차 물을 곳이 없다. 편지를 부치려 해도 길이 멀어 도착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길이 먼 것은 둘째고,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아예 갈 수조차 없었다. 참으로 처참하고 외로운 처지가 아닐 수 없는데, 이 아픔을 도지게 한 것이 바로 가을 이슬과 달이었던 것이다. 

가을 이슬이 촉촉이 적시는 것은 풀잎만이 아니다. 풀잎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적셔진다. 가을 달이 밝히는 것은 하늘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타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에게 어릴 적 고향 모습을 환하게 떠올리게 한다. 이슬에 젖고 달에 눈부신 가을밤은 이래저래 외롭기 마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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