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의 원칙
행정의 원칙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09.0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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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어줍게 보직을 잠시 맡으면서 세운 나의 행정원칙은 아래와 같다.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1. 적법성 : 일단 법에 맞아야 한다.

법은 이미 많은 토론을 거친 것이다. 여럿이 만들었고 다른 이해관계와의 충돌을 고려한 것이다.

2. 법의 정신 : 아무리 법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법이 만들어진 목적이다. 이른바 입법의 취지라는 것인데, 그것을 묻지 않으면 법은 고식(姑息)화되어 퇴물(退物)의 망령으로 남는다.

3. 만인성 : 법이 이 사람에게 다르고 저 사람에게 다르면 그것은 권위를 잃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럴 때 행정은 보편적인 행위가 된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4. 자율성 : 그래 봤자 법규다. 일이 되려면 적법한 행위를 그 정신에 맞게 공평하게 실현할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법과 규정은 사문(死文)으로 변하고 만다.

보편타당할 원리를 현실화시키는 것은 인간이고 그의 의지다. 문장이 아닌 사람에 의한 행정이 되려면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되고 진작되어야 한다.

5. 영속성 : 그런데 일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지도자가 바뀌었다고 멋대로 사업의 일관성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또 일은 일 나름대로 생명력이 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organism)이라서 함부로 다룰 것이 아니다.

수사적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법인’(法人)처럼 일도 살아있다.

6. 신뢰성 :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행정이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바로 상호 간의 믿음이다.

믿음은 예측가능성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조직의 ‘영속성’을 바탕으로 행정은 신뢰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이 원칙을 적용해본다.

문1 : 적법했는가?

답1 : 법을 몰랐다. 적법한지, 불법인지도 몰랐다. 무지했다.

문2 : 법의 정신을 생각했는가?

답2 : 법의 껍데기를 보느라 알맹이를 놓쳤다. 이상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았다.

문3 : 누구에게나 공평했는가?

답3 : 감정이 일을 방해했다. 죄가 밉지 사람이 밉냐.

문4 : 자율을 지켜주었는가?

답4 : 최고의 가치는 자유이고, 최상의 행정은 자치다. 말이 많았다.

문5 : 일을 살아있는 것으로 보았는가?

답5 : 나는 사라지지만 일은 남는다. 개인이 사업에 앞서서는 안 된다.

문6 : 믿게끔 했는가?

답6 : 나를 믿게 했는지는 몰라도 정녕 나의 조직을 믿게 했는가? 언제나 신뢰가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오직 하나를 지키고 싶었다.

거짓말하지 말자.

과연 이것이 지켜졌을까? 내가 들었던 이야기는 말하기 전에 ‘하나, 둘, 셋을 세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 둘, 셋을 세고 있지 못하니, 거짓말을 안 한 것이 아니고 못한 것 아닌가?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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