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난민 떠도는 영혼들을 위하여
국민과 난민 떠도는 영혼들을 위하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0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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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끝끝내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은 일상의 삶에 싫증을 느낀 부자들이 한동안 쉬어가는 해변. 터키라는 이름의 나라에 속해 있는 휴양지 보드룸 바닷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의 세살바기 아기 아일란 쿠르디에게 더 이상 사람 사는 세상은 없었다.

파도에 시달려 그곳까지 떠밀려온 어린 아기 아일란에게 그곳은 도저히 터키일 수 없었고, 당연히 그가 태어난 시리아는 더 더욱 아닌 더 이상의 국가가 아니었다. 아일란에게 그곳은 이미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국가와 더불어 국민이라는 이름도 실종되었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위태롭게 버텨야 했던 난민이라는 위험천만한 이름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에 신 또는 초인간적 존재를 우주와 사람의 지배자이며 인도자로 믿고 복종하면서, 일정한 의식을 통하여 예배하며 일정한 윤리나 철학의 기본으로 삼는 것으로서의 종교는 더 이상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태어난 뒤 단 하루도 평화를 누리지 못했을 세살바기 아기 아일란에게 국가와 국민의 이름을 버리고 헤매야 하는 ‘탈출’과 난민의 떠다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의 국가 시리아는 5년째 내전의 불길에 휩싸이고 있고, 정부군과 반정부군, 이슬람국가(IS)까지 뒤얽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일란에게 지구는 이미 안전하지 않았고, 그 책임은 시리아보다 힘이 센 나라이거나 아일란보다 먼저 세상을 살고 있는 성인이라는 이름의 ‘어른’에게 고스란히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 어찌됐든 기필코 목숨만은 부지해 더 이상 자식들에게는 지옥같은 국가에서의 불안함과 위태로움을 끊고 비교적 안전한 나라로 옮겨주려는 부모의 고난은 갸륵하다.

자기 국가와 국민의 안정된 삶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핑계로 난민들의 입국을 거부하거나 이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서방 선진국의 태도는 이해할 수도, 분노하기에도 쉽지 않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어른들이 이런 일을 애시 당초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패권주의 또는 무기 수출을 통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부추긴 책임은 강대국에게 있다. 그리고 지구촌 전체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인류적 공동체 의식의 실종이 세살바기 아기 아일란을 차가운 바닷가에서 죽게 만든 공동정범이나 다름없다.

쓸쓸한 바닷가에 떠밀려온 세살바기 아기 아일란의 주검과 500일이 넘도록 깊은 바다에 수장된 배 속에 갇힌 세월호의 어린 영혼이 자꾸만 겹쳐지는 9월의 아침.

이런데도 국가와 국민이라는 숭고하고 장엄한 이름은 유효한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리고 살아남아 있거나, 아니면 영혼일지라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자들의 고단함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감히 그 크기를 가늠하는 상상이 무례할 만큼의 청년실업 사태는 왜 또 떠오르는 지….

천국이 있거나 위태로운 난민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같은 국가와 거기 살고 있는 국민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곳은 사람이 그 어떤 것보다 먼저이고,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 세상의 모든 정착을 위해 떠도는 영혼들도 안심하는 곳 일 터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명복을 비는 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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