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그해 여름
노근리, 그해 여름
  • 이지수 <옥천삼양초 사서교사>
  • 승인 2015.07.0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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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 이지수 <옥천삼양초 사서교사>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노근리 그해 여름(김정희, 사계절)’은 바로 몇십 년 전 6.25 한국전쟁 중에 바로 이 나라 이 땅에서 일어났던 양민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한 아동문고다. ‘은실이’라는 어린 소녀를 중심으로 책을 읽는 독자들을 노근리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이자, 목격자가 되게 하는데 몰입이 너무 컸던지 나 역시 담임선생님이 아이들 출석부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울어버렸다.

책을 읽었을 때는 마침 여행에서 돌아오던 차 안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자마자 남편에게 노근리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당장 그날의 현장을 내 눈으로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실함이 들었다. 

왜 이제야 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까? 나름 역사가 좋아 한때 사학 부전공까지 했건만, 내가 좋아했던 것은 자랑하고 싶은 한국의 역사만은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은실이가 되어 사건의 목격자와 간접적인 피해자도 되었다. 은실이가 되어 겪어본 노근리 사건의 전말은 알고 나니 모르고 있을 때보다 속이 답답해져 왔다. 눈물도 사치, 어리다고 응석 부리는 것도 사치, 가족과 함께 한집에서 오순도순 사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린 내막에는, 개인의 그 어떤 선택도 적용되지 않았던 그날. 그날은 그렇게 오랜 침묵의 세월을 거쳐 바로 어제의 일처럼 내게로 다가왔다.

노근리 사건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한 달 후에, 한없이 평화롭던 충북 영동의 마을에서 예고도 없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의 눈앞에서 총부리를 겨눠가며 당장 피난을 떠나라는 미군 때문에 겨우겨우 피난길에 오른 수많은 이들. 은실이네도 그 가운데 하나다. 

막연히 철길 위를 걷고 있던 사람들 머리 위로 영문 모를 전투기가 나타나 난데없이 폭격을 가하는 장면은 차라리 소설이라 믿고 싶었다. 지금도 기차가 철컥거리며 다니는 바로 저 철길 위에서 많은 사람이 찰나의 비명을 지르며,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갔다. 아수라장이 된 이곳에서 은실이는 막냇동생을 잃었다. 가족은 누구에게나 소중할진대 만약에 이 일이 내게 닥쳤다면, 그 난리통에 나만 살아남았다면 난, 과연 그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만 했을까.

철길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쌍굴에 숨은 직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인…. 이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쌍굴 밖으로 나오려 할 때마다 미군은 조준사격을 가한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총알의 아비규환 속에 은실이는 엄마를 잃는다. 많은 이들이 죽어가며 흘린 피로 쌍굴다리 밑의 개울은 새빨갛게 물들어 흐른다. 

양민이라 불리는 그들은 왜 여기서 이유도 알 수 없는 억울하고 무서운 죽음을 당하고, 목격해야만 했을까. 이들은 그 누군가의 스파이도 아니었고, 피난길에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 속엔 어른 아이 구별도 없었다. 그들은 한 가족 전체는 물론, 같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정주고 살았던 선한 이들이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 당시 우리를 돕기 위해 참전했던 미군이 주범이다. 많은 이들이 스러져간 영동 쌍굴다리 위로 오늘도 무심한 듯 그때와 똑같은 경부선이 지난다. 세월은 흘렀지만 가여운 이들만 없어지고, 위로는 무심한 기차가 다니는 무거운 철길을 이고, 아래로는 온몸에 아직도 선명한 총알자국을 새기고 있는 노근리 쌍굴다리만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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