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의 작은 서울, 청주 서원경의 사람들
통일 신라의 작은 서울, 청주 서원경의 사람들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06.1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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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우여곡절 끝에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데 이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는 드디어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룬다. 기존의 영토보다 3배나 넓어진 신라는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데, 그것이 9주5소경이다. 오늘날 광역시의 개념과 비슷한 5소경은 각 지역의 가장 중심적인 곳에 작은 서울을 설치하는 것이었는데, 옛 고구려 땅인 원주에 북원경을, 그리고 백제 땅인 남원에 남원경, 가야 땅인 김해에 금관경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이전부터 충북지역이 중요한 곳임을 알았던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충주지역에 중원경을, 백제의 옛 영토였던 청주지역에는 685년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게 된다. 이는 청주의 토착세력을 견제하고 북방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청주지역 서원경문화는 백제문화의 기반 위에 점차 신라의 왕경문화인 경주문화가 더해지면서 발전하게 되었는데, 지방문화와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특히 청주에서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 ‘탁부(啄部)’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당시 서원경이 지방의 작은 도시가 아니라 수도 왕경인 경주에 6부제가 있었던 것처럼 ‘사량부’ ‘탁부’ 등을 갖춘 큰 행정도시 였음을 추측케 한다.

한편 서원경의 생활과 관련된 기록은 일본 정창원에 있는 촌락문서(신라장적)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라장적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8~9세기 경 서원경 4개 마을의 인구와 토지, 가축, 과일나무 등이 기록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라 때 서원경(청주) 지방 4개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행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 민정 문서 또는 신라 촌락 문서, 정창원문서라고도 부르는 이 문서는 1933년 일본 도다이사의 쇼소인(정창원)에 소장된 13매의 불경 중 파손된 《화엄경론》의 책갑을 수리할 때 내부의 포심에 덧붙인 휴지 중에서 나왔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청주의 어떤 촌락에 관한 기록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통일 신라 시대 서원경의 생활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용담동에 묻혀 있었다. 용담동 통일신라무덤은 동부우회도로에서 목련공원으로 향하는 교차로에 있었던 유적으로, 지금은 교차로 건설로 인하여 25기나 되는 무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청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무덤 떼로, 무덤의 형태는 구덩이를 판 후 깬돌을 이용하여 4벽을 쌓아 만든 돌덧널무덤이다. 무덤 바닥에는 시신이 놓일 수 있도록 잔돌을 깔아두었으며, 시신이 고정되도록 쐐기돌 같은 것을 목 또는 허리 부분에 고인 흔적도 확인되었다.

껴묻거리(유물)는 도장무늬토기가 대부분이며, 비교적 규모가 큰 무덤에서는 당시 상류층을 상징하는 청동허리띠장식이 나와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높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무덤은 서원경이 설치되었던 청주의 대규모 무덤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무덤과는 달리 좁은 지역에서 많은 무덤이 만들어져 일정한 세력을 가진 집단의 무덤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거 통일 신라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청주시(서원경)가 지난해 통합을 이루어 중부권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며 통일 한국을 선도할 미래 지향적 도시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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