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벗
술벗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05.20 2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유학할 때 좋은 벗을 얻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도 안 되는 말로 지껄이는 나를 보더니 수업이 끝나고 나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너 언제 나와 만나야겠다’는 신호를 발단으로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같은 과, 같은 학년이었으니 여러모로 이야기가 통했다. 거꾸로 말하면, 내 어학실력은 그 친구와 술 마시면서 늘어난 것이었다. 말을 잘해서 벗이 생긴 것이 아니라, 벗이 생겨 말을 잘하게 되었다. 그것도 술벗이었으니 되는 이야기, 안 되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떠들어댔겠는가?

그 친구와는 불문율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상대방이 ‘술 한 잔 하자’고 할 때 아무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냥 ‘시간 되냐’면 안 된다고 해도 되고, ‘내일 한 잔 할까’라고 하면 시간을 따로 잡아도 되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냥 찾아와 ‘술 마시자’고 하면 그것은 말동무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였고, 우리는 그런 감정을 존중했기에 서로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안줏거리로는 좋은 이야기, 나쁜 이야기, 교수들 욕, 우정, 여자, 정부비판 등 별의별 것이 있었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는 역시 철학적 주제였다.

많이 배웠다. 문재가 좋은 그는 쪽지 하나로도 나를 감동시킬 줄 알았다. 그의 편지는 열 번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술 먹을 때는 헬렐레하다가도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나를 움직였다.

철학적 토론만 했겠는가. 교정 호숫가에서 술을 먹다 대학경찰을 피해 잔디밭에서 포복도 하고, 친구의 여자 친구랑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친구의 친구들도 다들 개성이 넘쳐서 모이는 날이면 줄창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얼마 전에 뜬금없이 그 친구로부터 이메일이 날라 왔다. 오래된 사진 두 장과 더불어 단문이 붙어 있었다. ‘오래전에 보내고 싶었지만 보내지 못한 사진을 보낸다’고. 디지털 시대에 찍은 사진은 아닐 듯하다. 그러나 어쨌든 디지털 사진으로 첨부해서 보내왔다. 그 속의 나도 젊고 그도 젊다. 아마도 학회 차 갔다가 30대 후반에 만나 공원에서 찍은 사진 같다.

덕분에 컴퓨터 배경화면에 그 사진을 깔아 놓고 아침마다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친구를 10년 전에 만났을 때 대뜸 하는 말이 ‘나, 너 죽었는지 알았다’는 것 아닌가? 농담인 줄 알았더니, 참말이란다. 그래서 나는 그의 머릿속에서 한 번은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 생각이 떠올라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금방 죽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직 살아있어. 그러나 네 머릿속에서 나는 죽은 적이 있어서, 나는 나를 위해 울고 싶어.’ 그리고는 덧붙였다. “Don‘t be in mourning for me every morning. I will glory in you with morning glory.”(아침마다 나에게 조문하지 말아요. 나는 나팔꽃과 함께 그대를 축복하리니.) ‘모닝’ 그리고 ‘글로리’로 말장난을 한 것이다.

죽음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이 모두 종교에 빠져버렸다. 하나는 불교계의 법사로 떠올랐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

이제 만나면 우리는 어떤 말을 할까? 술 이야기 아니면 신 이야기? 아니면 주신(酒神) 이야기? 아니면 술벗 이야기? 아니면 금주론?

이제 술꾼 디오니소스가 죽음에 가까워지더니 지혜의 아폴로가 되고 만 것인가? 청춘의 참을 수 없는 광기는 어디 가고 노년의 지루한 평온함만이 남았단 말인가?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