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것과 약한 것에 대하여
강한 것과 약한 것에 대하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5.04.2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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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강자가 자기 사람 챙기는 것은 도리요 의리고, 약자의 그것은 비리다. 약자의 단결, 동료애를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강자의 일이란 ‘경제 성장’ ‘정치 개혁’ 따위의 거창한 말과 달리 간단하다. 약자가 열등감, 자기혐오,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여야 성공이다.”

최근의 신문을 보면 여성학자 정희진의 이 놀라운 역설(아니면 엄연한 현실)이 절로 떠오른다.

여전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풍자되는 위치에 어렵사리 오른 이는 잠옷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채 공관 안에 사실상 포위(?)된 듯 한 모습인데, 한때 그보다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은 희희낙락, 보란 듯이 4대강을 유람한다. 

범부의 입장에서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은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에게도 이처럼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엄연한 모양이다.

종편이라고 해서 싸잡아 한쪽이라고 하는 선입견을 깨트리고 공중파를 위협하는 경지에 오른 jtbc 뉴스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4월, 세월호로 떴다.

jtbc 뉴스가 떴다는 말은 팽목항 검푸르고 거친 바다에 가라앉은 통곡을 사람들은 아직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고, 또 그 슬픈 기억만큼의 불신이 상대적으로 크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 작용점의 시작에는 손석희라는 이름의 앵커에게서 풍겨나는 믿음직스러움이 있다.

소위 ‘할 말은 하는’ 속 시원함이 이 땅에 tv가 생겨나면서부터 길들여진 채널의 익숙함을 밀어내고 일부러 새로운 습관을 입력시킨다는 것인데, 그 가상함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손석희는 민주언론의 상징이었다. 내가 기자밥을 먹던 시절, 가까이서 본 공정 보도를 외치던 그의 모습과 방송 토론에서의 촌철살인은 그를 신화로 만들고 있는 필요충분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강자가 더 큰 강자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일련의 정치적 시련에서 신화는 금이 가고 신뢰는 상처를 입고 있는데, 부도덕한 방법으로 다른 특종을 가로채고 언론윤리를 의심하게 하는 음성공개가 그 원인균이다.

일년 전 팽목항에서의 무리한 질문으로 일으킨 물의에 대해 공공성보다는 선배로서의 일갈과 자성의 뜻을 보일 때만 해도 걱정이 기우가 될 것이라는 확신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문자와 음성 운운하면서 이어가는 편취된 음성파일에 대한 변병에 이르면 그 또한 독선과 아집, 그리고 일등만을 향해 질주하는 강자의 모습과 다를 게 무어 있겠는가.

다시 정희진의 말. “인간이 옆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는’ 이유는, 시간(미래나 과거)을 매개로 한 권력욕 때문이다. ‘지금 여기’를 살면 소유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삶 자체를 누릴 수 있다.”는데….

우리는 ‘지금 여기’는 커녕 아주 오래된, 그리하여 낡디 낡은 강한 것들과 그로인해 만들어진 신화에 목매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때다.

더불어 이어령의 젓가락을 놀랍거나 새롭기 그지없음이라는 맹목으로 잡고 있는 건 아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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