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소리 그리고 움직임
봄의 소리 그리고 움직임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5.04.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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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건 아무래도 물소리일 것이다.

깊은 겨울을 지내는 동안 계곡물은 숨죽은 듯 고요하다. 잔뜩 언 몸을 경직시켜 움직임을 멈춘다. 그런 한 겨울에도 두터운 얼음 그 밑으로 물이 흐르기는 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미약하며, 그나마 얼음의 두께에 막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날이 풀려 사람들이 이제 봄이 오리라 기대할 때쯤 제 몸을 풀어 헤친 물은 여기저기 갇혀 있던 동무들을 불러내 기지개를 켜며 억눌려 왔던 음량을 키운다.

흐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봄의 물소리는 겨우내 움츠리던 생명들의 귀를 간질이며 들깨운다.

깊은 산 계곡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물소리는 흐르고 흘러, 또 여러 갈래가 모이고 또 모이기를 거듭해 이미 충분하게 몸을 풀어 버린 냇물과 만나고 강물이 되어 비로소 봄을 완성한다.

소리를 키우면서 물은 언 땅을 들썩이게 하고, 흙은 모든 식물의 뿌리를 자극함으로써 어느 것 하나 다름없이 물의 기운을 줄기와 가지, 그리고 잎눈과 꽃눈 그 끝까지 보냄으로써 움직임을 만든다.

소리가 동작을 만들어 가는 모습.

가만히 세상 만물의 이치를 바라보면 봄은 침묵에서 깨어나 살랑거리는 바람에 꽃들과 나무를 춤추게 하는 한 편의 무용극 같다.

그런 봄은 그러나 아주 짧다. 두꺼운 겨울옷을 벗고 부드러운 봄옷의 촉감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반팔 옷을 꺼내 입어야 할 만큼 온도계 수은주 올리는 속도가 빠르다.

봄은 빠르고 짧을 뿐만 아니라 단 한 차례도 기-승-전-결 순탄하게 흐르는 법이 없다.

겨울의 독재는 그만큼 모질어서 산 넘어 남촌에서 불어오는 봄 처녀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꽃샘추위가 어김없이 시샘한다.

화무십일홍, 열흘 붉은 꽃 없다고 앞 다퉈 우주를 열어가는 꽃들 역시 정신없이 피고 지기 바쁘다. 여유를 갖고 둘러보지 않으면 언제 꽃피고 언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서럽도록 아름다운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의 황폐함은 또 봄을 얼마나 아쉽게 하는가.

노란 개나리, 영춘화 피어난 뒤 그 꽃그늘 아래에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호사는 꿈도 꾸지 못한 채 목련꽃 하얀 꽃은 늙은 몸으로 지고 벚꽃이 흐드러지는 자연의 질서는 무너진 지 이미 오래.

세상의 모든 꽃이 구별없이 일제히 피었다 지는 군대 제식훈련을 방불케 하는 봄을 낭만이라 부르는 사치는 더 이상 없을 듯하다.

4월이 갓 열흘 남짓 지났을 뿐인데 계절이 서둘러 마무리되는 느낌은 나만 갖게 되는 것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과 참지 못할 그리움. 그리고 여전히 치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처와 분노로 남쪽 깊은 바다는 푸른 멍을 더 짙게 드리우는.

잔인한 4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16일을 앞두고 서둘러 꽃이 지는 이유를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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