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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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3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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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죽음의 춤
김훈일 주임신부(초중성당)

중세기 가을이 무르익어가던 1374년의 어느 날, 사람들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집 밖으로 쏟아져 나와 길바닥을 메우고 정말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춤추다 지친 사람들은 길거리에 탈진해 쓰러졌고, 이렇게 모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광란의 춤은 계속 됐다.

춤추는 사람들의 행렬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다녔고, 행렬이 한 도시에 도착하면 무슨 일인가 잠시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곧 이 행렬에 뛰어들었다. 행렬이 두껍고 길어질수록 춤은 한층 더 격렬해졌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춤의 마력에 도취돼 갔다.

'죽음의 춤(Tanzwut)'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중세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작자를 알 수 없는 바젤 지방의 1440년 作 '죽음의 춤'이다. 해골로 묘사된 죽음은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죽음의 춤에 끌어들임으로써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소박하면서도 확실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죽음의 춤'은 중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의 공포에 대항하는 인간의 절망적 모습의 극적인 표현이었다. 페스트는 귀족이나 평민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도 가리지 않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한 마을이 사라지기도 했고, 치료 방법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가면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그 죽음은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그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천년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다가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존재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간다.

죽음은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다. 멸망도 아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축복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세의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 성월로 정하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언젠가는 죽어야할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성찰해 보기를 권고한다. 연옥이란, 죄는 용서받았으나 천국의 영광을 얻기 전에 영혼이 정화되고 단련되는 곳을 말한다. 이 달에는 그들이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힘입어서 하루 빨리 영원한 평화를 누리도록 기도한다.

이와 함께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첫째, 우리에 앞서 살다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나의 삶은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진정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면서 자만하지 말고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둘째, 인류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고난의 역사라고 하겠다. 역사의 구석구석에는 가련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많다. 이런 이들을 기억하면서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셋째, 신앙인은 앞서 간 이들을 기억하면서 자기 자신의 죽음도 생각해야 한다. 서양의 공동 묘지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고 쓰인 문구를 가끔 만나게 된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심판 받을 것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잊거나 외면하기 때문에 너무도 많이 욕심 부리고 미워하며 거짓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이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지 않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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