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 한 번 더 날고 싶은…
버드맨, 한 번 더 날고 싶은…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5.03.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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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인간은 새로 변신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는 절대 날 수 없다. 다만 기계의 힘으로 수평에서 수직으로 떠오를 수 있음을 기화로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날고 싶다는 욕망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정신성에 바탕을 둔 이성적 판단에 해당되는 이 영역은 오로지 인간만이 꿈꿀 수 있다.

하늘을 나는 일, 즉 비상(飛上)은 신분과 처지에 대한 상승의 욕구이거나 좌절과 실패를 떨쳐내고 회복하기를 희망하는 과정에서 절실하게 표현된다. 간혹 그러한 기대와 희망이 무산되거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 극단의 선택에서도 허공을 날아가는 역린의 꿈을 꾸기도 한다.

멕시코 출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버드맨>은 제87회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등 주요 4개 부문을 수상한 수작이다.

헐리웃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분)이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 도전을 통해 꿈과 명성을 되찾기 위한 절치부심의 과정을 그린 <버드맨>은 생각이 많은 영화다.

보여주고 보는 행위 예술의 장르라는 공통점이 있는 영화와 연극은 처지와 받는 대접이 서로 다르다. 기계적 장치와 시스템에 의해 전달되는 영화의 경우 예술로서의 순수 영역보다는 주로 상업적 대중성을 겨냥한다.

반면에 영화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연극은 일반 대중보다는 특정 계층에 의해 향유되는 고급 예술로서의 차별적 대접받기를 희망한다.

영화는 촬영된 필름에 의해 영사기를 비롯한 기계적 장치만 있다면 얼마든지 반복재생이 가능하나, 연극은 아무리 정교하게 연출되고 연기된다해도 공연마다 똑같을 수 없는 일회성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연기자들은 성공을 향해 가는 궤적을 연극으로 시작해서 영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 넣는 선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후에 다시 연극 무대를 그리워하기도 하는데, 그 속내에는 영화와 연극이 가져다주는 아우라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영화 <버드맨>은 몰락한 연기자의 부활 혹은 재기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과거 상상의 세계를 그린 블록버스터 영화 <버드맨>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고 부유한 영광을 누렸던 영화배우 리건 톰슨은 브로드웨이를 발판으로 부활을 꿈꾸며 재기의 발판을 연극으로 삼는다.

리건 톰슨 역을 맡은 배우 마이클 키튼은 실제로 버드맨과 유사한 캐릭터와 형식으로 이루어진 영화 <배트맨>의 원조로 출연한 적이 있어 명성과 함께 존재감마저 상실한 뒤 되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의 일맥상통이 절묘하다.

그런데 이 영화 <버드맨>이 단지 옛 명성을 그리워하며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상업적 욕망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리건 톰슨은 혼자가 아니다. 늘 환영처럼 그를 뒤따르고 있는 ‘버드맨‘과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대중성과 예술성에 대한 자아의식의 흔들림을 유혹하는 부분에 이르면 인생의 거울과 짙은 회한, 또는 영원불멸의 예술혼에 대한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편집의 흔적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카메라 워킹 역시 이 영화와 우리네 인생의 닮은꼴이다. 

성공이든 실패가 됐든 마감되기 전까지 삶은 계속될 것이다. 무대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주인공은 딸의 시선을 따라 하늘로 올랐고, 그 하늘엔 새떼가 날고 있다. 

날 풀려 새들의 날갯짓은 더 분주한데, 한 번 더 날고 싶은 새타령이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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