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흔적
  • 전영순 <수필가>
  • 승인 2015.02.16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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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얽힌 나만의 기억

까치가 울고 아침 햇살이 퍼지는 새해 아침,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큰집으로 향했다. 옥천전가 집성촌이었던 우리 집안은 우직골 큰집부터 차례를 지냈다. 어릴 적 우리 형제는 제사가 많은 큰집을 제일 부러워했다. 큰집은 우리 집에서 백오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두메산골인 우리 동네는 산줄기가 주름치마 같은 곳에 집들이 다랑이 논처럼 자리하고 있다. 아직도 설날하면 나랑 삼종지간인 큰집 새언니에게 세뱃돈 받던 일이 눈에 선하다. 10원에서 50원 받기까지는 몇년이 걸렸다. 그놈의 세뱃돈에 눈멀어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려다 얼음판에 넘어져 그때의 흔적이 내 이마에 기울어진 이등병 계급장 모양으로 꼭꼭 새겨져 있다. 가난의 흔적이다. 엄마는 내 이마의 상처를 볼 때마다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픈지 “가난이 죄지” 하는 한숨의 소리가 내 이마에 난 상처보다 깊다.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때지 싶다. 설 전날 밤 엄마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우리 사남매를 정성스레 목욕을 시켜놓고 감나무 밑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집안과 자식 잘되라고 기도했다. 목욕재계한 나는 잠자리에 누워 세뱃돈과 음복을 먹을 수 있다는 설렘으로 한밤중에 큰집을 수차례 다녀왔다.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시피한 나는 아침이 밝자 동생들과 큰집으로 향했다. 워낙 오지다 보니 겨울에는 날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비탈진 길은 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작은 빙판을 만들었고 발은 동상을 늘 달고 살았다. 얼음길을 피해 가자면 산 뒤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빨리 가려는 마음에 얼음길을 택했다. 잘 올라가다가 얼음판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하얀 얼음길이 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이마에서 퐁퐁 솟는 피를 양손으로 막고 울면서 큰집에 갔다.

제관들은 피범벅이 된 나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골이라 병원도 없고 차례를 지내야 했으므로 임시로 아기 기저귀를 찢어 내 이마에 둘둘 말아놓고 차례를 지냈다. 나는 차례 지내고 먹을 음식을 생각하니 욱신거리는 이마는 뒷전이었다. 음복은 겨우 입맛을 다실 정도였지만 꿀맛이었다. 집안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보니 명절이 되면 마당까지 사람들이 꽉 찼다. 차례를 지내고 세뱃돈 받는 재미도 쏠쏠했다.

현재의 나는 어린 시절 집안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보냈던 추억이 밑거름되어 힘든 세상에도 버팀목이 되어 꿋꿋하게 잘살고 있다. 가난했지만 이웃이 어렵거나 힘들 때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몸으로 배우고 익혔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하는 현실 앞에 나는 어릴 적 북적거리던 큰집이 그리워진다. 명절 때마다 떠나있던 집안이 한자리에 모여 윷놀이도 하고 집안 대소사를 상의하던 다정한 얼굴들이 모여든다.

이번 명절에는 이마에 난 흔적을 더듬으며 아날로그 시간을 재현해 보는 의미에서 영화 국제시장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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