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향기
그녀의 향기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02.12 18:5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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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시샘달. 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칼칼한 바람이 살갗을 찌른다. 한참이나 바람 속을 걷는다. 동구나무를 지나 으름나무가 제 몸을 다 드러내고 서 있는 중간마을을 스친다. 어린 시절 으름을 따서 흐뭇하게 먹던 시간이 기억 속에서 푸드득 날아간다. 달맞이꽃이 노랗게 웃던 둑을 건너 칡꽃이 붉은 향기를 피워내던 언덕을 지나 윗마을에 다다른다. 계절의 흐름을 느끼며 산책하는 길, 기억도 같이 흐른다. 

길가에 자라있는 냉이가 나를 보고 웃는다. 땅을 밀고 올라와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겨울의 모진 바람을 뚫고 잎샘 추위 속에 초록으로 생명을 피어 올리고 있다. 가만히 키를 낮추어 본다.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여기저기 냉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바구니 가득 진한 봄 향기를 담는다. 납작하게 지면을 덮고 있는 잎을 손으로 살짝 든 후 호미로 땅을 판다. 주변의 흙을 좀 넓게 판 다음 냉이를 잡아 뽑는다. 하얗고 긴 뿌리가 쑤욱 나올 때의 쾌감은 나물 캐는 것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야생의 냉이는 그 향이 다르다. 마트에도 냉이는 지천이다. 얼마 지불하지 않더라도 손쉽게 식탁에 올릴 수 있다. 그러나 냉이라고 다 똑같은 냉이는 아니다. 마트에서 산 하우스재배 냉이는 향기가 없다. 몸집은 야생 냉이보다 커서 먹을 것이 많아 보이지만 실은 맹탕이다. 그러나 들에서 한겨울을 뚫고 올라온 냉이는 나름의 진한 향기가 있다. 사람도 그렇다. 아픈 시간을 견딘 사람은 싱겁지 않다. 삶의 눈물이라는 감미료가 첨가되어 진한 맛을 낸다.

그해 봄 그녀는 내게 다가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향기로 남아 있다. 그녀와 나는 같은 동네에 살았다. 고무줄도 같이하고, 봄이면 나물도 캐러 다니고, 시험기간이면 공부도 같이했었다. 그녀의 가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술을 달고 사셨고 어머니는 남매를 공부시키느라 파출부 일을 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였지만 늦게 집에 오는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을 돌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이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는 그를 피해서, 우리 집으로 동생을 데리고 피신을 오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녀는 깁스한 나를 한 달 내내 업고 등교를 했었다. 이십 분이 되는 가깝지 않은 거리를 나를 업고 다니던 그녀. 한참을 업고 가다 힘들면 서서 나를 길에 내려놓고 헉헉거리던 그녀. 그녀의 숨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그녀는 서울의 구로공단에 취직했다. 그리고 각자 연락을 못 하고 지냈다. 그러나 그녀를 나는 잊지 못한다.

봄나물을 끓여 저녁을 차린다. 입안에서 향기가 확 풍긴다.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향기로운 시간을 만들고 있을 그녀를 떠올려 본다. 아직도 내겐 너무 진한 향기로 남아있는 그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모진 시간을 아름답게 견뎠으니, 따듯한 봄날 속에 웃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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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2015-04-03 22:33:03
감사 감사

김준혁 2015-03-30 05:28:48
이번 글 너무 좋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