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고 싶은걸
감추고 싶은걸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5.02.0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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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소풍 가는 아이처럼 달 뜬 마음도 함께 실었다. 도착지는 강남터미널, 그곳에서 작은딸과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서울에 갈 때면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내 나이쯤 되는 여성들이다. 그들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훔쳐본다. 화려한 원피스에 기품 있는 외투를 걸쳤다. 거기에 같은 빛깔의 핸드백과 목에 두른 스카프가 매력적이다. 유난히 우아한 머리가 돋보이는 여인을 만났을 땐 나도 모르게 선망의 눈길을 보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딸아이가 시간 맞춰 마중 나왔다. 오랜만에 외출이라며 딸이 백화점에 가잔다. 멈춰선 곳은 다양한 모자가 진열된 상점이었다. 딸이 나에게 모자를 써보라며 자꾸 권한다. 손사래를 쳐보지만 기어코 딸은 모자를 사서 내 손에 선물이라며 쥐여주는 게 아닌가. 속내를 감추고 싶었는데 들켜버린 심정이다.

싱그럽던 젊은 날에는 생머리가 좋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었다. 신혼 시절 아이를 낳고도 생머리를 고집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새댁보다는 학생이라 불리기도 했다. 달콤한 말에 이끌려 감추기보다 오히려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머리카락이 빠지더니 정수리가 휑한 게 볼품이 없다. 윤기도 나질 않는다. 가끔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고 젊은 아이 엄마가 할머니라고 부를 때 또는 지인들의 “염색 해야겠어요” 라는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렇잖아도 거울 속의 초라한 내 머리 모습에 주눅이 드는데 이제 나도 늙는다는 생각에 쓸쓸해지곤 했다.

머리손질 할 때마다 이렇게 투정을 했었는데 딸은 어미가 하는 말을 귓전으로 흘리지 않은 모양이다. 한 번은 큰딸이 가발을 사왔다. 처음엔 모양새가 나는가 싶더니 낯설었다. 인위적으로 풍기는 멋은 자연스런 머리보다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들킨 적도 있다. 손질도 까다롭다. 

그런 단점들을 감추고 싶어 미장원에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풍성하고 윤기나는 머리를 위해 파마를 하고 짙은 염색을 했다. 그것은 예쁘지 않은 외모를 가려주었고 소박한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감도 생겼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피부가 가렵고 홍반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상처가 커지고 가라앉질 않는다. 불안하여 병원을 찾았다. 주치의는 알레르기 질환이란다. 염색도, 파마도 하지 말란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고생스러워 파마머리를 포기하고 말았지만 아쉬운 미련으로 남았다.

모처럼 딸과의 동행은 칼바람에 싸늘했지만 모자에서 전해지는 질감은 봄날처럼 포근하다.

외출하려고 모자를 눌러쓴다. 올겨울에는 모자로 머리를 감출 수 있겠지만 내 마음은 감출 수 없을 것 같다. 이순을 훌쩍 넘긴 이 나이에도 아직은 나도 여자라고 억지를 부려보고 싶고 흘러간 세월의 무늬인 흰 머리를 감추고 싶은 걸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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