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오후
느린 오후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5.02.0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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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수필가>

전화를 끊고 나니 막막하다. 걷고 싶어 여유를 두고 나왔는데 일정이 최소 되었단다. 다음 스케줄까지 세 시간 틈이 생겨버렸다.

눈부신 오후. 멍하니 붐비는 교차로를 바라본다. 규칙적으로 바뀌는 신호. 어느 쪽으로도 방향을 틀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서 있는 자신이 낯설다. 차를 가지고 나왔더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갔거나 친구라도 만나러 갈 텐데 세 시간이란 틈은 참으로 애매하다. 늘 그물처럼 시간을 짜놓고 계획표대로 움직이는데 익숙한 내게 찾아온 예고 없는 쉼표.

짜증보다는 난감함에 휩싸여 그냥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습기 없는 바람은 청량하나 맵다. 코끝이 시려 눈물이 날 즈음 낯익은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조용한 카페는 햇빛과 그림자가 사이좋게 반씩 차지하고 있다. 빛과 그림자 경계선에 놓인 자리를 고른다. 몸은 그림자 안에 두고 창가를 향해 앉았다.

왼쪽 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카페 정문과 다른 나라다. 빈 논, 벼 그루터기 중간 중간 작은 얼음 덩어리들에서 햇빛이 튕겨 오른다. 이따금 무리지어 날아가는 새 그림자들이 심심한 들판에 무늬를 그린다. 논이 끝나는 모퉁이, 빨간 깃발이 꽂힌 집 마당에는 개집이 두 개 나란히 지붕을 맞대고 있다. 파도가 살랑대듯 어른거리는 새 그림자를 잡느라 누렁이들의 앞발은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선수 같다.

하늘을 보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수습하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카페 직원이 와 메뉴를 내민다. 드립커피중 제일 긴 이름을 가진, 익숙한 단어가 하나 끼어있는 커피를 주문한다. 먼 곳에서 들리듯 클라리넷 화음이 풀려나온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아다지오. 광대하게 펼쳐진 아프리카의 풍경, 카렌과 데니스의 눈빛이 마주치며 흔들리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 설렘과 낭만이 빈 논의 풍경과 어우러지며 새로운 영상을 그려낸다. 참 좋다.

코끝으로 마시는 커피가 식을 무렵 새들은 더 이상 날지 않고 강아지들도 엎드려 존다. 읽다만 책을 꺼내 마저 읽는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 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냥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불러달라.

당신이 오래전에 있었던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그 대답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워터멜론 슈가에서>‘

선문답 같다. 소설은 슬프다. 자연과 문명의 불화가 흐르는 이야기의 화살이 내게로 향한다. 자신들에게 닥치는 위험에는 단호하게 대처하고 (워터멜론 슈가를 만드는) 선량한 일을 하지만 결국 자기 삶의 경계선 밖 타자에게는 무관심한 배타적인 소설속 사람들은 곧 우리 자화상이리니.

평화롭던 마음의 균형이 깨진다. 황량한 논 위로 구름 그림자가 넓게 드리워지며 어두워진다. 자연과 문명의 경계선에 자리한 카페안에도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음악은 다시 되돌아와 처음과 같은 클라리넷이 흐른다. 싸늘하게 식은 커피 값을 계산하고 나온 거리는 온갖 소음으로 9시 뉴스처럼 복잡하고 어지럽다. 그래도 나는 걸어야한다. 그게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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