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도시와 이어령 그리고 미셀 푸코
생명도시와 이어령 그리고 미셀 푸코
  • 정규호 <칼럼니스트·문화기획자>
  • 승인 2015.02.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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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단상
정규호 <칼럼니스트·문화기획자>

한때 우리나라 문화부 장관을 맡기도 했던 이어령씨가 석학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소설가, 평론가, 작가, 사회기관단체인, 심지어 정치인으로 까지 소개되고 있는 그는 1956년 <우상의 파괴>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도 왕성하고 수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이 시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일찌감치 <흙속에 저 바람 속에>를 통해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설파하면서 그가 예로 든 주사위와 윷에 대한 비교는 지금 세태에서도 참으로 절묘하다.

단 한 개의 주사위로 결정하는 서구문화와 달리 네 개의 윷가락이 모여 비로소 나아갈 길을 정하는 윷놀이 방식이야말로 개인이 아닌 단합된 힘이라는 논리는 우리 민족의 높은 사회성을 이해하는 첩경으로 충분하다.

이후 <신한국인>,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지성의 오솔길>, <지성에서 영성으로>로 이어지는 그의 천착은 그 과정이 현대를 가로지르는 인간 지성의 궤적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지극한 민족적 자부심에서 비롯되는 우월감 내지 우수성을 시작으로 디지털이라는 인류 신문명이 아날로그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당위성에 이어 지식 정보의 시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흐름은 지금 산업사회의 이정표가 된다. 그런 인간과 인류에 대한 탐구에 이어 최근 ‘신(神 )’의 영역에 귀의하는 영성의 강조는 차라리 지극히 심오하다는 표현 외에 무에 더 할 말이 있으랴.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는 우리 정체성의 모든 측면들은 권력관계의 산물로 인식한다. 권력이란 사회관계 전체에 퍼져있는 힘의 흐름으로 개인이나 집단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아우르는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이 개인들이나 기구들의 손에 독점, 소유 될 수 없고 그저 우리의 생각을 구조화하는 사회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의 이론 속에서 권력이 반드시 지배와 연관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권력은 하향적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며 지배란 사회 내 권력의 일차적 표현들 중의 하나로서 계급 관계의 형태를 띨 수도 있지만 권력의 복잡한 작동이 계급 관계라는 단일한 요소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이어령과 푸코를 단순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어령씨가 최근 청주의 화두를 ‘생명도시’로 삼아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깊은 의미가 있다.

<감시와 처벌>을 통해 파놉티콘이라는 원형 감옥의 이론을 제기한 푸코는 지금 어디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디지털 CCTV 만능의 시대와 분리될 수 없다.

디지털과 사람의 따뜻한 인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있다.

생명도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생명권력’과 ‘생명정캄일 터인데, 도시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에는 ‘일상적 삶’과 도시민들의 ‘생물학적 신체의 건강함’.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시민의 역할과 참여, 그리고 소통이 얼마나 보장되느냐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한마디로 도시가 얼마나 인간적이며, 그곳에 살거나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얼마나 사람 사는 냄새를 만끽하며 오래 오래 기억하게 하는 가에 도시 경쟁력이 있다.

생명공학이니 바이오 산업이니 하는 과학적 장치들은 결국 모두가 사람을 행하는 것이니 그 다음, 생명도시로 향하는 큰 길의 수단일 뿐이다. 사람이 먼저다. 흔들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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