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스토리
러브스토리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5.01.22 17: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반영호 <시인>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잦다. 예년과는 달리 첫눈부터 소담하게 내렸었다. 주일이 멀다하고 내리는 통에 눈치우기가 지겨울 정도다. 반대로 눈이 내리면 제일 좋아하는 게 우리 집 누렁이다. 내리기가 무섭게 천방지축 빠대 놓는 바람에 제설작업이 더욱 곤혹스럽다. 어쩌랴. 누가 뭐래도 개는 개다워야 하느니.

눈 내리는 날이면 시리지만 가슴 깊숙이 다가오는 애절한 감동의 명화가 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 감동과 여운이 남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명화 러브스토리. 눈밭을 누비며 사랑을 나누는 남녀. 그리고 전주곡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노래. 바로 겨울을 대표하는 ‘로맨스’영화 러브스토리다.

명문 부호의 아들인 올리버와 이태리 이민 가정의 가난한 제니퍼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한다. 모든 이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행복하게 지내는 두 사람이었지만 제니퍼에게 건강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제니퍼는 백혈병에 걸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40여년이 지났음에도 여전이 가슴을 절이게 하는 아름다운 영화다. 

나는 나다워야 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나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름대로 성질이나 특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쉽지만 거꾸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답다는 것은 또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자기주장만 펼치는, 자칫 오만하고 불손해지기 쉽다. 

그답게 사는 친구가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고 떳떳한 친구. 정의롭고 올곧으며 명랑하고 씩씩하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조금은 손해보는 듯, 남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는 강하다. 그러나 강자에게는 강하지만 약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친구다. 사람을 대할 때는 기준을 조금 낮춰야 한다. ‘이만큼 이겠지’가 아니라 ‘이만 못할 수도 있다’이다. 모두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또 조금은 밑진 듯 양보하는 멋진 친구.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운동을 하고, 30리나 되는 직장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그야말로 단단한 체구는 건강의 대명사였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그 친구가 혈액암에 걸렸다.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 제니가 앓았던 그 백혈병이다. 오진이겠지…. 아무도 믿으려하지 않았으나 사실이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본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친구는 도리어 담담했다. 곧 서울 큰 병원에 입원하였다. 세균감염 예방치료를 위한 무균실은 완전 통제구역으로 면회도 되지 않았다.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한 사내가 불쑥 사무실을 들어섰다. ‘누구시죠?’하는 물음에 ‘나여 나’했다. 한참 살펴본 후에야 친구를 알아봤다. 입원한지 한 달여 만이다. 온통 가려졌지만 얼굴이 핼쑥하다는 걸 단번에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건강하던 친구가. 눈물이 핑 돌았다. 말문이 떨어지지 않는 나에게 친구가 도리어 충고의 말을 했다. ‘건강 챙겨라. 죽음 앞에 가본 사람은 알아. 나밖에 없는 겨. 내가 있고 네가 있는 거지’

나는 나다워야 한다는 불역지론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늘 뜻을 같이했던 대꼬챙이 같은 친구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친구가 내게 읊어야 할 윤동주의 서시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누가 뭐라던 묵묵히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말해야 할 친구. 

하늘이 잔뜩 흐린게 또 눈이 올라나 보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눈밭에서 한 쌍의 다정한 남녀가 뛰어다니는 장면. 올리버와 제니의 영상과 친구의 얼굴이 연달아 겹친다. 현재는 백혈병 완치율이 많이 높아졌다. 더욱이 곧고 강한 친구는 단연코 딛고 일어설 것이다. 어디선가 프란시스 레이의 감동적인 음악이 들려온다. 라라라랄라라라라랄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