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밖으로 듣던 말
귀 밖으로 듣던 말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5.01.1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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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새해 첫 산행은 덕유산 향적봉이다. 새해가 되었으니 부자 되라, 건강해라, 문운이 있어라 등등 마음을 담아 보내는 덕담을 향적봉에서 받았다. 

맹렬하게 차가운 겨울의 꼭짓점이다. 한해의 다짐과 지난 시간을 정리하기에 명징하고 명쾌한 해답처럼 바람이 개운하다. 향적봉은 겨울을 제대로 느껴보기에도 좋은 곳이지 싶다. 

나는 사람들이 건강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는 말이 한때는 공허하게 들렸다. 부자, 건강 가슴에 와 닿지 않은 말들이라고 넘겨버렸다. 한심하게도 나는 좀 건강하지 못하더라도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 건강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는 해당 없으므로 귀 밖으로 들었던 말들을 이제는 가슴으로 들으며 살아간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아침운동을 나간 남편이 들어올 시간보다 빨리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하는 말이 “여보 나 어디 갔다 오는 거지?” 묻는다. 장난치는 줄 알고 나는 “운동하고 오시는 거지” 그랬더니 또 “내가?”하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다. 운동 나가기 전에 나랑 주고받은 말도 모른단다. 지난밤에 딸하고 놀던 것도 모른단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이 혹 알츠하이머(치매), 큰 일났다싶었다. 아직까지 건강에 자신 있다고 하는 남편이 오십 후반에 벌써 그러면 어쩌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딸아이가 이런 아빠를 보며 울었다. 그런데 방금 전일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꿈에 눈길에서 두 번이나 넘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옷을 살펴보니 흙이 묻지 않았다. 

같이 나가자고 하는 걸 눈도 오고 날씨가 추워 혼자 다녀오라고 한 것을 나는 크게 후회했다. 남편의 운동화 자국을 따라 가 보았다. 두 번 넘어진 흔적이 있었다. 뇌진탕으로 순간적인 기억상실이 온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을 건강에 위협을 받아보니 진리임을 절감했다. 

눈만 뜨면 자의든 타의든 말하고 듣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세상에는 두 귀로 들리는 말이 수없이 많다. 그중에 몇 마디나 새기며 살아가는가. 대부분 말들은 귀 밖으로 듣고 버린다. 또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취하는 경우도 많다. 

새파랗게 젊은 날에는 무서운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작은 일도 무섭다. 상대방에게 악담하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어미는 말조심, 행동조심 해야 하는 어른들의 말씀을 이제는 젊은 사람들에게 내가 하고 있다. 그들도 나처럼 귀 밖으로 듣고 버릴지라도.

난 향적봉에서 나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던 분들에게 진심을 담아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보냈다. 침묵만으로도 장관이 되는 것이 자연이다. 아무리 오래 머물러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것이 또한 자연이다. 향적봉의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살고 싶다. 

나의 새해소망이라면 내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큰돈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 큰 탈 없이 누구에게 칭찬한마디 들어 기분 좋은 날, 내가 누군가를 칭찬해주어 흐뭇한 날,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밥 한 끼 나누는 즐거움으로 채워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제는 건강하라는 말이 가장 귀한 말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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