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다는 것
듣는다는 것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01.0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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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듣는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얄팍한 성격에 나쁜 이해력까지 겹쳐 남의 말도 쉬 알아듣지도 못하는데다가 눈치도 없어 생긴 고민이다. 도대체 듣는다는 것은 무엇이기에 많은 사람이 ‘들어라’고 말할까? 말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듣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요즘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가장 큰 물음이다.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듣는다는 것의 반대편부터 말해보자. 말하는 것, 그것은 주장이다. 내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 그것은 표현이다.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장과 표현은 좋은 것이다. 자기를 보여주는 행위는 자기를 감추는 행위보다는 덜 엉큼하고, 더 솔직하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의 주장이나 표현이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너 아프겠다.’ ‘그 사람 슬프다.’ ‘참 안 됐다.’ 이런 말은 내가 하는 말이지만 남을 보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말은 자기 말이긴 한데, 남의 입장을 생각하거나 그리는 것이기에 내 말이라기보다는 남의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말은 이런 종류가 될 것이다. ‘배고파.’ ‘밥 줘.’ ‘재밌다.’ 이런 말에는 모두 ‘나’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을 뿐 모두 나의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한다. ‘나, 배고파’, ‘나, 밥 줘’, ‘나, 재밌다’이다. 많은 말이 곧 나를 말한다. ‘웃겨.’ ‘미워.’ 이런 말이 남에 대한 말 같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여전히 나를 묘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빠, 웃겨’와 ‘엄마, 미워’라는 말이 아빠와 엄마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분명 아빠와 엄마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말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 자신을 주장하고 표현함으로써 자기의 생존이나 지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언어는 사회적 약속으로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주의주장을 밀고나가기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상태를 알리기 위해 남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말이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수단의 면모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듣는다는 것은 그 정반대에 있으니 단순논리로도 이타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는 것이 이기적이라면 듣는다는 것은 이타적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기쁨이나 슬픔을 드러내는 행동의 건너편에 바로 듣는다는 것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남을 위한 행동이다. 듣는다는 것은 곧 남을 달래는 처음이자 끝인 셈이다. 

학생이 찾아오면 나는 차만 끓여준다. 그런데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한참이 지나면 스스로 정리하고 해답을 얻어나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나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스스로 배운다. 참으로 놀랍고 이상한 일이다. 말하면서 마음을 풀고 머리를 가다듬어 마침내는 두발로 씩씩하게 일어난다. 신기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이러지 못한다. 수많은 정보가 있는데 그것을 전달할 욕심에 말이 많다. 사람들이 알면 좋을 사실이라는 공연한 배려심이 나를 말 많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의 방식대로 사실을 인지하고 구성하고 추측할 것이다. 내가 그러듯 말이다. 

나의 말에 상처받았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빈다. 이런 말조차 말하는 것이기에 이기적인 말이 아니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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